‘라라랜드’에서 스펙테이터를 신고 탭댄스를 추는 세바스찬(오른쪽)과 미아. 처음엔 세바스찬만 스펙테이터를 신었다가, 벤치에 앉아 나란히 발을 움직이는 장면에서 통일성을 위해 미아도 이 신발을 신는 것으로 결정됐다. 작은 사진은 흰색과 검은색 가죽을 사용한 스펙테이터. 스페인 구두회사 메즐란(Mezlan) 제품이다.

한 달쯤 전 아내와 함께 '라라랜드(LA LA Land)'를 본 건 주말 내내 돌배기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나가떨어진 일요일 밤이었다. "삑삑삑." 다음 주말이 올 때까지 아이를 돌봐주실 '이모님'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비로소 외출이라도 해볼 생각을 한다. 거창한 작당 모의라도 하듯 집을 나서지만 그 시간에 갈 곳이라곤 차로 10분 거리인 영화관이 고작이다.

오디션마다 떨어지는 배우 지망생 미아(에마 스톤)와 크리스마스날 재즈바에서 잘린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영화는 이 미완성 청춘들의 이야기를 잔잔한 선율에 얹어 풀어간다. 음악이 주인공인 영화인지라 남자 주인공의 패션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이 있었다. "마음속에 아무런 불꽃도 튀지 않고 이 아름다운 밤만 허비할 뿐"이라던 남녀가 함께 스텝을 밟으며 서로의 마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던 해 질 녘의 탭댄스 장면이다.

여기서 이들이 주고받는 노래엔 "폴리에스터 슈트를 입고도 제법 괜찮아 보인다"는 여자에게 남자가 "이거 울(wool)이에요"라며 항변하는 가사도 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 슈트가 아니라 구두다. 세바스찬은 놀랍게도 두 가지 색상을 조합한 '스펙테이터(spectator)'를 신고 있지 않은가!

지금 스펙테이터를 신고 거리에 나선다면 나비넥타이만큼이나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하지만 세바스찬의 구두는 그다지 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춤추기 전 하이힐을 벗고 핸드백에서 스펙테이터를 꺼내 갈아신은 미아와 달리 세바스찬은 줄곧 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부둣가에서 흑인 부부의 춤에 끼어들 때, 거리의 영화 촬영장 앞을 지날 때, 미아와 함께 그리피스 천문대에 들어설 때도 그랬다. 마치 다들 신발장에 이런 구두 서너 켤레쯤은 있지 않으냐는 듯이.

1) 14세 소년 시절의 존 F 케네디(오른쪽) 전 미국 대통령이 아버지(가운데), 형과 나란히 스펙테이터를 신고 찍은 사진. 2) 1942년 작 뮤지컬 영화 ‘너무도 아름다운 당신’(You were never lovelier)에서 스펙테이터를 신고 춤추는 프레드 애스테어(오른쪽)와 리타 헤이워스.

스펙테이터의 시초는 19세기에 영국 구두 제작자 존 롭이 폴로 경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닳는 부분에 가죽을 덧대 만든 신발로 알려져 있다. 스포츠 클럽의 관람석에 이 신발을 신은 신사들이 늘어나면서 '관중'이라는 의미의 스펙테이터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멸종 위기 동물처럼, 남성 패션 책에서 구두를 다루는 장(章)의 마지막 페이지쯤에 등장할 뿐이다.

어딘가 모르게 빈티지 느낌을 주는 이 신발을 신어보고는 싶은데, 흑백의 대비가 선명한 스펙테이터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갈색 가죽에 베이지색 캔버스 천을 사용한 신발을 '소심하게' 사본 적이 있다. 캔버스 부분은 보통 가죽 구두처럼 크림과 왁스로 닦을 수 없고 그렇다고 신발을 통째로 빨 수도 없어서 관리하기가 몹시 어려웠던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세바스찬은 왜 스펙테이터를 신었을까? 단지 춤추는 장면이라 댄스화(靴)가 필요했을 뿐이었다면 다른 디자인을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세바스찬이 하나도 아니고 적어도 두 가지 디자인의 스펙테이터를 번갈아 신고 나오는 건 할리우드 뮤지컬에 대한 오마주를 신발에 담은 연출이라고 믿고 싶다. 경의(敬意)는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초창기에 스펙테이터는 점잖은 신사보다 난봉꾼들이 애용했다. 그러다 보니 간통 피고인과 불륜 상대를 함께 지칭하는 '코리스폰던트(co-respondent· 공동 피고) 슈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두 가지 색을 쓰는 데 빗댄 언어유희다. 이후 배우나 댄서들이 이 신발을 즐겨 신으면서 점차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이 전설의 패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뮤지컬 배우 프레드 애스테어(1899~1987)다. '화니 페이스'에서 오드리 헵번과 춤출 때 이 신발을 신었고, 라라랜드가 빌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 '너무도 아름다운 당신'의 댄스 장면에서도 스펙테이터를 신고 리타 헤이워스와 호흡을 맞췄다. 이렇게 스펙테이터가 복권(復權)되는 시기는 이 영화가 예찬하는 할리우드의 황금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더구나 세바스찬은 돈 때문에 행사를 뛰고 마음에 없는 연주를 할지언정 진짜 재즈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지 않던가. 스펙테이터는 20세기 초반의 재즈 시대를 풍미한 신발이기도 하다. 재즈의 선배들이 걸쳤던 폭 넓은 바지와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을 세바스찬은 더 이상 입지 않지만 구두에만은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기억을 남겨놓고 있다.

뮤지컬과 재즈, 그리고 할리우드. 이 모든 것을 품은 공간이 LA다. 영화는 LA를 단순히 배경으로 빌려오지 않고 LA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노래한다. 영화를 본 이들이 저마다 가진 'LA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시란 이렇게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이 간직한 기억의 총체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은 현실적이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잠시 서로를 향하는 듯하다가 이내 각자의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비극적이지는 않다. 세바스찬은 지금도 스펙테이터를 신고 휘파람을 불며 LA 거리 어딘가를 걷고 있을 것이다.

옥스퍼드·블루처·로퍼… 오늘은 뭘 신을까?

남자 구두 종류

남자 구두도 생각보다 디자인이 다양하다. 작은 디테일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날 옷차림에 맞춰 골라 신는 재미가 있다.

끈 묶는 구두도 끈을 매는 부분의 디자인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옥스퍼드(oxford)'와 '블루처(blucher)'. 옥스퍼드는 구두끈 구멍이 뚫려 있는 양 날개의 아래쪽이 발등에 덮여 고정된 신발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학생들이 부츠 대신 신었던 단화가 유행하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남자 구두 중에서 가장 격식 있는 디자인이다. 남자 패션의 교과서 같은 영화 '킹스맨'에는 '옥스퍼드, 낫 브로그'(Oxford, not brogue)라는 암호가 등장한다. '브로그'는 앞코나 절개선에 장식을 넣기 위해 뚫은 작은 구멍을 말한다. 즉, 킹스맨에서는 가장 우아하면서도 품격 있는 스타일인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를 암호로 사용한 것이다.

블루처는 반대로 날개 아래쪽이 발등 위로 올라와 터져 있는 신발이다. 군화에서 유래했다. 이 신발을 고안한 인물은 나폴레옹의 호적수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게르하르트 폰 블뤼허 원수. 이 사람의 영어식 발음이 신발 명칭이 됐다. 옥스퍼드, 블루처도 발끝 장식에 따라 명칭이 나뉜다. 발끝에 아무 장식이 없는 것을 플레인 토(plain toe), 가로로 하나의 절개선이 들어간 것을 스트레이트 팁(straight tip), 'W'자를 뒤집은 모양처럼 생긴 것은 새의 날개를 닮았다 해서 윙 팁(wing tip)이라고 부른다.

끈 없는 구두는 '로퍼(loafer)'라고 한다. 끈 묶을 필요 없이 구멍에 발만 넣어 신으면 된다 해서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영단어 '로퍼'가 붙었다. 정장보다는 캐주얼에 알맞고 청바지에도 잘 어울린다. 발등에 동전 하나 들어갈 정도의 틈을 내서 장식한 것을 '페니 로퍼', 술이 달렸으면 '태슬 로퍼'다.

벨트처럼 버클이 달린 구두는 '몽크 스트랩(monk strap)'이다. 옛 수도사들의 샌들에 달려 있던 버클을 연상시킨다는 데서 온 이름이다. 버클이 하나면 싱글 몽크 스트랩, 두 개 있으면 더블 몽크 스트랩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 신는 신발은 옥스퍼드지만, 요즘은 슈트에 더블 몽크 스트랩 구두를 신는 것이 패션에 관심 많은 남자 사이에서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