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의 최대 위기다. 차기 대선에서 보수 재집권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정치 세력으로서의 보수는 통째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보수 주류가 시대착오적 기득권 집단으로 여겨진 지 오래되었다. 정치적 무게를 극대화하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보수 정당들의 구애(求愛)에 응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구성을 말하는 등 청와대 문전까지 이른 양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의 총체적 위기를 극적인 부활의 계기로 삼을 여지는 남아 있다. 역사를 거스르는 수구 반동 세력과 합리적 보수가 완전히 결별해야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반(反)사회적이고 반(反)국가적인 한 줌의 특권 세력은 역사의 뒷전으로 강제 퇴장시켜야 마땅하다. 벌거벗은 이익 추구에 바쁜 가짜 보수가 죽어야 자기희생과 도덕성을 갖춘 진짜 보수가 산다. 대한민국 자체가 보수가 주도한 나라라는 자긍심이야말로 이런 반전(反轉)의 출발점이다. 대선을 겨냥한 특정 세력의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길게 멀리 보아야 한다. 보수의 이념과 지향을 고뇌하는 철학적 성찰이 절실하다.
강력한 보수 세력이 엄존함에도 보수 고유의 정치 철학은 불분명하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퇴행이 생생한 증거다. 출근조차 하지 않은 채 나랏일을 무자격 사인(私人)에게 맡겨 국정 농단을 부른 '바지 대통령'이 보수를 대표할 순 없다. 국가의 대의(大義)를 팽개치고 허수아비 대통령을 맹종한 채 친박 패거리의 소리(小利)에만 집착해 역사를 후퇴시킨 집단이 보수를 참칭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검찰의 기소장과 국회 청문회가 폭로한 '자칭 보수'의 무책임, 무능, 비정직성과 불법, 불의, 비합리성은 참된 보수의 정치적 책임 윤리와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야말로 보수의 근본이념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한국 보수는 철학을 갖춘 성숙한 보수주의로 승화되어야만 한다. 군사독재 시절 냉전 반공주의가 굴절시켰음에도 입헌주의적 견제와 균형의 원리, 권력 분립, 법치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 같은 시민적 기본권도 불가침의 자유 민주적 근본 가치다. 가짜 보수인 박근혜 정권의 헌정 유린은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를 훼손하고 민주공화국을 위협했다. 공정한 시장경제도 한국 보수주의의 기둥이다. 시장경제의 성공과 생산력 확대는 보통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토대를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창출했다. 숱한 논란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높이 평가받는 맥락이다. 하지만 명암이 섞인 박정희 모델에서 박근혜 정권은 정경 유착과 경제적 양극화라는 부정적 측면만 계승해 합리적 시장 질서를 파괴했다.
냉전 반공주의가 왜곡한 자유민주주의와 천민자본주의가 변형시킨 시장경제를 되살리는 게 현 단계 한국 보수의 최대 과제다. 국무회의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자유 토론을 대통령이 금기시하고 대법원장을 정보기관이 사찰하며 색깔론과 블랙리스트로 비판 언론과 문화·예술인들을 옥죄는 냉전 반공주의는 음침한 반자유민주주의적 작태다. 정권과 재벌이 특권과 이권을 부당 거래해 국민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사회 통합을 해치는 건 추악한 천민자본주의다. 냉전 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는 결코 자유민주주의와 같이 갈 수 없다.
6·25전쟁의 참화와 보릿고개의 절대 빈곤은 한국 보수의 원형적 기억이다. 비참한 과거를 넘기 위한 한국인의 처절한 노력 없이 현재의 번영은 불가능했다. 보통 사람의 체험에서 우러난 소중한 통찰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북핵 위협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안보는 철통같이 지켜져야 하지만 냉전 반공주의로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산업화에서도 재벌의 공이 크지만 정경 유착으론 더 이상 경제 발전 자체가 어렵다. 과거에 머무르는 보수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온전한 자유민주주의와 공정한 시장경제만이 우리 공동체를 지킬 진짜 애국심과 시민 의식을 낳기 때문이다.
진정한 보수는 법치주의의 준칙과 정의의 덕목을 솔선수범한다. 개혁적이고 포용적인 사회경제정책을 펴야 성숙한 보수다. 이렇게도 절박한 시대적 요구를 돌아보면 반기문이 보수 정당에 합류하느냐 여부는 사소한 정치적 사건에 불과하다. 합리적 보수는 국방을 튼튼히 함과 동시에 공정성의 원리로 사회적 약자를 껴안는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경제적 격차가 줄어야만 보수가 지향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다. 한국 보수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역사적 사명 앞에 담대히 홀로 섰다. 새해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