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이 여리박빙(如履薄氷)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비상 대응 체제의 필요성을 언급했다(11월 8일자 A4면). '여리박빙'은 '얇은 얼음을 밟듯 몹시 위험함'을 가리키는 말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이것을 그냥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이 살얼음 밟듯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였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며칠 후에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만나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힘을 합쳐 어려움을 넘기자며 '같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는 '동주공제(同舟共濟)'라는 말을 인용했다.
매년 한 해를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로 정리하는 '교수신문'은 올해는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순자(荀子)의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말로,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성난 민심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매주 광장에 모여 하야를 외친 끝에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이끌어낸 상황을 빗댄 것이다.
우리는 한자 문화권이고,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도 지지를 얻고 있다. 하지만 세상사를 굳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로 표현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우리 말과 글이 없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일종의 지적 허영심 아닐까. 연말연시를 맞아 공기관과 기업에서도 한 해를 정리하고 내년을 기대한다며 생소한 한자어를 줄지어 내놓고 있다. 사자성어·고사성어를 뒤지는 시간에 한글 사전과 속담 사전을 살펴보고 좋은 우리말을 찾아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