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은 '휘게'
뜨게질로 옷 해입고, 가족 식사에서 촛불 밝히는 덴마크인
'웰빙'을 뜻하는 휘게 라이프는 소박한 가정식 행복을 중요시
한국인이 휘게하기 위해선 남과 비교하는 마음부터 없애야

지난 8일 강남구 청담동에서 열린 핀란드 디자인 페어. ‘겜미’(Gemmi) ‘마리타 후리나이넨’(Marita Huurinainen) ‘투로’(Turo) 등 남성, 여성, 아동, 잡화 카테고리의 9개 패션 브랜드와 ‘카우니스테’(Kauniste) ‘발릴라’(Vallia)를 비롯한 텍스타일, 가구, 리빙 카테고리의 7개 브랜드 등 총 16개 브랜드의 쇼룸과 바이어 상담 및 VIP 리셉션으로 진행됐다.

지난 8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열린 핀란드 라이프 스타일·디자인 페어는 유통업계 바이어들과 관람객 600여명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핀란드 가정의 소박한 그릇부터 패프릭, 아기자기한 소품, 가죽 가방, 여성복, 아동복까지 다양한 상품이 전시됐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요즘 패션, 리빙업계에서는 ‘북유럽 스타일’이라는 말만 붙여도 불티나게 팔려갈 정도로 소비자들이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크다. 특히 장식품과 그릇, 촛불, 양말 등 북유럽의 감성이 드러난 제품에 관심이 많은데, 핀란드 식기 브랜드 이딸라는 한국식문화에 맞춘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북유럽 스타일에 대한 인기가 단순 유행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고 있다고 판단했다. 말 혹은 부엉이가 그려진 소품, 알록달록한 패브릭에서 이제는 그릇, 옷, 신발까지 북유럽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넓어지고 있다. 김윤미 주한핀란드무역대표부 대표는 “북유럽 스타일은 심플하고 예쁜 디자인을 넘어서, 실용성과 철학을 갖췄다. 특히 최근 가성비가 중요해지면서, 북유럽 제품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니즈도 커지고 있고, 더 다양한 제품이 한국에 소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한 대학생 신하윤씨(26세·강남구 삼성동)는 북유럽 제품을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북유럽 사람처럼 행복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유럽은 복지가 잘되어 있어서 국민 만족도가 높은 나라로 꼽히잖아요. 그래서인지 그들이 쓰는 물건에도 ‘행복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투박하게 손으로 뜬 것 같은 털실양말과 단순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을 상당히 배려한 식기류를 보면 북유럽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어요.”

마이크 비킹 덴마크 행복연구소장

◆ 북유럽 행복의 비결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휘게’ 덕분

덴마크 행복연구소장이자 ‘휘게라이프’의 저자인 마이크 비킹은 지난달 서울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행복 연구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단기간 내에 엄청난 속도로 경제적 성장을 이뤘지만 부의 축적이 삶의 질로 잘 연결되지 않고 있는 나라죠. 삶의 질이 많이 좋아졌는데 삶의 만족도가 높지 않다는 점도 독특해요.”

아울러 그는 “한국은 1인당 GDP가 세계 29위인데 행복지수는 58위에 불과하다”며 “사회적으로 많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로 인해 일과 가정의 균형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이 발간한 ‘세계 행복 보고서 2016’에 따르면 157개국 가운데 덴마크는 행복 랭킹 1위였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하는 ‘더 나은 삶의 질 지수’에서는 38개국 가운데 덴마크가 3위를 차지했다.

비킹 소장은 덴마크인의 행복 비결이 ‘휘게(Hygge)’에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휘게는 ‘안락하고 아늑한 상태’를 뜻하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여유를 즐기는 소박한 덴마크식 라이프스타일을 함축하는 단어다.

◆ 휘게란 ‘촛불 곁에서 마시는 핫초콜릿 한 잔’…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난 행복감

집 안에서 털실 양말을 신고, 핫초콜릿 한잔을 마시는 사람. ‘휘게’의 전형적인 장면이다.

생소한 덴마크 단어 하나가 한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BBC 방송 등 서구 언론이 소개하면서 휘게 열풍이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휘게 라이프를 소개하는 서적이 각국에서 출간됐고, 인스타그램에는 휘게 해시태그(#) 사진이 넘쳐난다. 지난달 옥스퍼드 사전이 뽑은 ‘올해의 단어’ 후보 중 하나가 ‘휘게’였다. 영국 사전출판사 콜린스도 올해의 단어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휘게’를 꼽았다. 국내에선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라는 책이 출간되자마자 판매 순위 상위권을 점령했다.

지난달 국내에 출간된 ‘휘게 라이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촉발된 킨포크 라이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확산된 단샤리(斷捨離, 미니멀 라이프)는 휘게와 맥을 같이 한다. 더는 과거와 같은 물질 풍요를 누릴 수도 없고, 그걸 지향하는 삶을 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린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물질이 아닌 사람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김용섭 소장은 “국내총생산(GDP)으로만 사회 수준과 삶의 질을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불만이 역으로 터져나오면서 물질만능주의, 치열한 경쟁, 이 속에서 젊은 층은 이제 휘게까지 받아들이게 됐다. 우리에게 닥친 불황의 골이 꽤 깊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휘게는 특정 사물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편안하고 행복한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다. 흔히 집에 머무는 느낌,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을 뭉뚱그려 휘게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따뜻한 음료, 양초, 벽난로, 보드게임 등이 휘게를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다. 비킹 소장은 자신의 책에서 휘게를 ‘촛불 곁에서 마시는 핫초콜릿 한 잔’에 비유하기도 했다.

가족들과 둘러 앉아 촛불을 켜서 저녁 식사를 하는 덴마크인의 휘게스러운 일상.

그는 “휘게는 노르웨이어로 ‘웰빙’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비롯됐고, 덴마크에서는 50∼100년 전부터 많이 사용해 왔다”며 “휘게는 일반 명사이지만 접두사나 접미사로도 많이 쓰인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덴마크에서는 주방이나 거실의 아늑한 구석 공간을 ‘휘게크로그’, 친밀한 대화를 ‘휘게스나크’, 일요일에 여유롭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쇤다스 휘게’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덴마크인들에게 집은 단순히 먹고 자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휘게의 장소이다. 덴마크인들이 몸을 치장하는 대신 집을 꾸미는 데 공을 들이는 것도 단순히 예쁜 인테리어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집과 가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한스 웨그너, 아르네 야콥슨, 핀 율 같은 가구 디자인 거장들이 배출됐다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 한스 웨그너

◆ 한국도 휘게할수 있을까?…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국에서도 휘게를 실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올해 꽃병과 향초, 코코아분말차의 매출이 작년에 비해 50~300% 증가했다. G마켓 관계자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옷, 가방 같은 재화보다는 집에서 혼자 즐기는 자기만족형 상품 매출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테리어 업체 한샘 관계자는 “최근 덴마크식 휘게 라이프가 인기를 얻으며, 휘게의 철학을 담은 가구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매장에서 덴마크 스타일 가구를 문의하는 경우가 꽤 있다. 실제로 올해 가족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은 작년 대비 2배 정도 더 팔렸다”고 말했다.

대학원생 이원의(26·부산시 우동)씨는 “대학 합격, 취업, 승진, 높은 연봉 등 커다란 성취 때문에 행복할 수도 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도 행복하고 주말에 집에서 늦잠 자는 것도 행복하다"라며 소소한 행복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문제는 마음가짐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을 요구하다 보니 자꾸 타인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행복해지고 싶다면 우선 그런 경쟁의식부터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는 덴마크의 휘게식 라이프

비킹 소장 역시 한국이 특히 상대적으로 행복지수가 낮은 이유 중 하나로 ‘남과 비교하는 사회 분위기’를 지적했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남들이 얼마나 가졌는지 비교하면서 더 불행하게 느끼는 것 같다. 특히 청소년들은 부모와 사회가 기대하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데도 항우울제 처방률은 꼴찌에서 두 번째다. 사회적으로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워 정신적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건 큰 문제이다. 한국인이 휘게를 실천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어려울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들, 즉 가족과 친구, 이웃, 직장동료 등과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