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대선을 앞둔 지난달 28일, 89세 노파가 동영상을 통해 호소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로 알려진 게르트루드(Gertrude) 부인은 “가장 두려운 건 누군가가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자극해 다른 이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며 “이런 현상을 1930년대에도 봤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무섭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게르트루드 부인은 한 사람에 대한 지지를 말렸다. 바로 노르베르트 호퍼 (Norbert Hofer) 오스트리아 자유당 대통령 선거 후보다. 지난 4일 치러진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호퍼는 오스트리아 자유당(Freedon Party of Austria,FPÖ) 후보로 출마했다. 호퍼와 자유당은 반 이민 및 반 난민, 유럽연합(EU) 탈퇴 등을 주장하며 최근 지지세를 넓히고 있다. 호퍼를 지지하는 시민단체 ‘정체성 행동(Identity Action)’ 등도 등장한 지 오래다.

지난 4월 실시된 오스트리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노르베르트 호퍼(우) 자유당 후보가 1위를 기록하자 환호하는 모습이다. 헤인즈-크리스천 스트라체(좌) 자유당 대표와 손을 맞잡고 있다.

◆ 휠체어에서 일어난 ‘의지의 사나이’

노르베르트 호퍼는 1972년 2월 오스트리아 포라우(Vorau)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호퍼의 아버지는 발전소 엔지니어였다. 보수 성향의 오스트리아 국민당(Austrian People`s Party, ÖVP) 소속의 지방의회 의원이기도 했다.

호퍼는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소재의 고등학교에서 항공학을 전공한 이후, 1990년부터 1991년까지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라우다 항공(Lauda Air)에서 항공 엔지니어로 3년 간 근무했다.

호퍼가 인터뷰에서 항상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순간이 있었다. 2003년, 그는 슈투벤베르크(Stubenberg)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추락했다. 이 사고로, 척추에 큰 무리가 가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6개월의 재활 끝에,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됐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퍼는 이후 장애인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노르베르트 호퍼는 두 번의 결혼으로 네 아이를 두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최근 개신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 천천히 밟은 정치행보, 속도 내는 과격발언

항공사를 퇴사한 1995년, 호퍼는 오스트리아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 정치적 동반자인 헤인즈 크리스천 스트라체(Heinz-Christian Strache)를 만난다. 스트라체는 2005년 자유당 당대표를 맡아 현재까지 당을 이끌고 있다.

1996년부터 2007년까지, 호퍼는 아이젠슈타트가 있는 부르겐란트 주 당 대표와 아이젠슈타트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6년부터는 지역 의회 의장으로 지명됐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연방 의회 진출에도 성공했다. 2013년 9월, 오스트리아 국민의회 제3의장으로 임명됐다.

이때부터 호퍼는 거침없는 발언을 시작한다. 지난해 2월부터 호퍼는 “이탈리아 영토인 남부 티롤(South Tyrol)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더 많다”며 “오스트리아가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호퍼는 “유럽의회의 구속력이 더 강해지거나, 터키를 유럽연합에 받아들인다면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총선거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자유당도 호퍼와 마찬가지로 반난민과 반EU 입장을 보이고 있다.

◆ ‘나치 뿌리 깊은 나무’, 오스트리아 자유당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1956년 창당했다. 안톤 라인탈러(Anton Reinthaller)와 프리드리히 페터(Fridrich petter) 등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전력이 있는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이 주로 활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 부역자들은 살아남아 자유당을 만들었다. 창당 이후 10석 내외의 의석을 확보하는 군소정당으로 분류됐다.

독일과 달리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에 부역했던 정치인들도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분단을 우려해 국제사회에 오스트리아 역시 나치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라는 점을 적극 역설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한다면 스스로 전범국임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결과적으로 분단은 막았지만, 나치 부역자 처벌에는 소극적이었던 셈이다.

자유당은 1990년대 중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중산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회민주당과 국민당으로 양분된 기존 정치체제에서 경제와 문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겠다고 주장했다. ‘보통사람과 중산층의 보호자’, 자유당의 구호였다.

변화는 빠르게 나타났다. 케른텐 주지사였던 외르크 하이더(Jörg Haider)가 당권을 잡은 1990년 총선부터 득표율이 10%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1999년 총선에서 26%의 득표율로 95석을 차지하며 원내 2당으로 도약했다.

2005년에는 당 내부 권력 투쟁 후 헤인즈-크리스천 슈트라헤가 당 대표로 지명된다. 노르베르트 호퍼 역시 이때부터 슈트라헤를 도와 당 업무 전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과거 급진 학생운동 전력이 있던 슈트라헤는 기존 온건 노선을 배척하고 극우 색채를 입히기 시작했다.

민심은 차가웠다. 자유당은 슈트라헤 당선 직후 실시된 2006년 총선에서 1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이후 자유당은 사회복지, 구매력 향상 등 경제 문제를 거론하며 네오나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2005년 자유당 내부 투쟁에서 패배한 외르크 하이더가 새로운 극우정당인 국민연합(BZÖ, Büntnis Zukunft Österreich)을 만든 상황 역시 자유당의 ‘극우 이미지 탈피’를 도왔다.

2008년 이후 자유당은 다시 지지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2008년 총선에서 34석을 확보한 이후, 2013년 총선에서는 20% 득표율을 보이며 40석을 차지했다. 자유당은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발칸 루트’를 통해 밀려든 중동 출신 난민에 대한 반감을 표하며 강력한 반이민정책을 시도했다.

자유당의 부상은 기존 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과 보수 성향의 국민당이 양분했던 정치 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충분했다. 지난주 오스트리아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자유당은 20%가 넘는 지지율을 보였다. 이에 반해, 국민당(11.8%), 사회민주당(13.3%)의 약세는 더욱 두드러졌다.

◆ “민주사회에서 유권자는 항상 옳다”...2전 3기는 가능할까

지난 4일 노르베르트 호퍼 자유당 대선 후보가 결선투표 재투표를 위해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호퍼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중도 좌파 성향의 판 데르 벨렌 후보에게 패배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국무총리가 실권을 갖는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 총리·각료 임명권, 의회해산권, 군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권력은 국무총리가 행사한다. 임기는 총리가 5년, 대통령이 6년이다.

지난 4월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자유당 후보 노르베르트 호퍼는 35.1%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거대 정당인 사회민주당과 국민당 후보들이 각각 10%를 간신히 넘는 초라한 성적을 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차 투표에서는 순위가 뒤집혔다. 대선 결선투표 최종 개표 결과 무소속 알렉산더 판 데어 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 후보가 50.3% 득표율로 49.7%를 기록한 호퍼 후보에 승리했다. 자유당의 약진에 놀란 유권자들이 결선투표에서 판 데어 벨렌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탓이 컸다. 투표율도 높았다. 72.7%를 기록해 2010년대 들어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부재자 선거 개표 과정에서 부정 의혹이 일었다. 부재자 투표에서 투표용지가 정상적으로 접착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부재자 투표 개표 과정에서 참관인들이 동석하지 못했다는 자유당의 공세도 이어졌다. 대법원은 10월 재투표를 명령했다. 9월에 추가로 접착제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투표일이 12월 4일로 연기됐다.

5월부터 11월까지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호퍼는 판 데어 벨렌에 앞섰다. 10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52%의 지지율을 보였다. 여기에, 지난달 9일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면서 더욱 힘이 실렸다.

호퍼 역시 “트럼프의 승리로 이제야 심리적 장벽이 느슨해졌다”고 말했다. ‘심리적 장벽’이란 자유당에 붙어 있는 나치 잔당 이미지를 말한다. 이어, 호퍼는 “난민 유입을 통제하지 않는 내각은 해산하겠다”며 반난민 구호를 적극적으로 외쳤다.

녹색당 대표를 지냈던 중도 좌파 성향 판 데어 벨렌 후보는 반대로 접근했다. 러시아 이민자 2세로 태어난 판 데어 벨렌 후보는 “호퍼와 자유당이 주장하는 오엑시트(AUEXIT, 오스트리아의 유럽연합 탈퇴)를 막아야 한다”며 “자유당은 대통령 자리를 오직 정권을 넘겨받는 과도기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됐기 때문에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더 가깝게 협력해야 한다”며 “오스트리아는 유럽 연합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4일 실시됐던 결선 재투표는 이변이었다. 판 데어 벨렌 후보가 53.8% 득표에 성공해 46.2%의 득표율을 보인 노르베르트 호퍼 자유당 후보를 눌렀다. 여론조사와는 상반된 7%포인트 격차인 큰 승리였다.

호퍼 후보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대중이 내린 결과는 항상 옳다”며 “누구를 택했는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오스트리아인이다”라고 말했다.

영국 BBC방송은 “친유럽 국제감각을 갖춘 후보가 당선된 결과에 유럽 지도자들이 내쉰 안도의 한숨 소리가 매우 컸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역시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오스트리아는 EU, 특히 독일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으며, EU를 탈퇴해 단일 시장 접근이 차단된다면 경기침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아직 자유당에게 기회는 남아있다. 대선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자유당은 20%가 넘는 지지도를 기록했다. 오스트리아 내 정당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자유당은 이제 2018년 9월에 열리는 총선에서 원내1당을 노리고 있다. 내각책임제 국가이기 때문에 원내 1당이 된다면, 총리 지명까지 가능한 상황이다.

헤더 그라베 오픈소사이어티재단 산하 유럽정책연구소 국장은 “이번 선거가 끝이 아니다”라며 “대선을 통해 입지를 다진 자유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유럽연합 탈퇴 등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