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번호 44145번. 34년 전 이 복서는 18년형을 선고받은 강도범이었다. 마약 중독 아버지 밑에서 자라 11세에 술과 마리화나에 손을 댔고, 13세에 강도질을 시작했다. 17세엔 무장강도로 붙잡힌 미국 필라델피아의 불량배는 교도소에서 처음 복싱을 배웠다. 5년이 지나 감형으로 풀려난 그는 "복싱만이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이라며 직업 복서가 됐다.

그는 프로 복싱의 '살아 있는 전설' 버나드 홉킨스(51·미국)다. 전 미들급·라이트헤비급 통합 챔피언 홉킨스는 오스카 델라 호야, 펠릭스 트리니다드 등 무수한 레전드를 때려눕히고 1993년부터 2005년까지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미들급에선 역대 최다 기록인 20차 방어에 성공하며 10년간 장기 집권한 수퍼 스타다.

만 51세 프로 복싱의 살아 있는 전설이 자신의 마지막 결투를 기다린다. 프로 통산 55승(32KO)을 거둔 버나드 홉킨스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강렬한 표정으로 앞을 보는 모습. ‘FINAL’(마지막)이란 글자가 새겨진 마우스피스가 눈에 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화려한 기록이 최근까지 쓰였다는 것이다. 2011년 만 46세의 나이로 WBC 라이트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승리한 홉킨스는 조지 포먼의 45세 기록을 갈아치우고 최고령 타이틀 매치 승리자가 됐다. 2014년 4월 만 49세 3개월의 나이로 WBA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 돼 역대 최고령 세계 챔피언 기록을 새로 썼다. 통산 전적은 55승(32KO) 2무 7패(2경기는 무산).

홉킨스는 만으로 51세 337일이 되는 18일 스스로 '여정(journey)'이라 부르는 28년 복싱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에서 조 스미스 주니어(미국)를 상대로 라이트헤비급 12라운드 경기를 갖는다. 그의 67번째 경기이자 은퇴 경기다. 2014년 11월 세르게이 코발레프(러시아)에게 판정패를 당한 이후 2년 만의 복귀전이다.

이 경기는 '51세 복서의 아름다운 은퇴를 위한 이벤트 경기'가 아니다. 상대 스미스는 통산 전적 22승(18KO) 1패의 떠오르는 27세 신인이다. 홉킨스보다 스물네 살 어리다. 홉킨스가 데뷔(1988년)한 다음 해에 태어난 선수다. 자신을 걱정하는 시선에 대해 홉킨스는 "나는 한계를 설정하고 싶지 않다. 후회 따윈 남기진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내가 바로 '복싱 노장' - 지난 5일(현지 시각) 기자회견 당시 일부러‘노인’복장을 하고 등장한 버나드 홉킨스. 복싱 선수로 이미 노년을 훌쩍 넘은 나이(51세)란 걸 표현하기 위해 흰 수염을 붙이고 지팡이를 들었다.

46세에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잭 니클라우스, 47세에 인디500에서 우승한 레이서 알 언셔 등 늦은 나이에 세계 정상에 오른 수많은 스포츠맨이 있지만 권투는 본질적으로 다른 스포츠다. 그래서 홉킨스는 특히 존경받는다.

그의 코치와 지인들은 홉킨스를 '사각 링의 수도승'이라 불렀다. 그는 휴가도 없이 1년 내내 체육관을 찾아 운동을 하며 체력을 관리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스태프, 친구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튀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유기농 식재료로 직접 요리한 음식만 먹었다. 약물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아 한 번도 도핑에 걸리지 않았다.

팬들은 늘 그가 언제 은퇴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젊은이들은 원래부터 링에 서는 법이고, 늙은이들은 링에서 밀려나지 않게 버티는 거야. 그게 자연의 법칙이지." 홉킨스가 은퇴를 종용했던 이들에게 전한 말이다. 그의 애창곡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다.

젊은 시절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검은 망토를 걸치고 음산하게 등장해 '사형 집행인(The Executioner)'이라고 불렸던 홉킨스는 이젠 흰 수염이 성성하고 이마의 주름도 깊어졌다. 경기 전 기자회견엔 수염을 붙이고 지팡이를 짚고 나와 '복싱 노장'을 익살스럽게 연기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정점에서 쓸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