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따님의 심장 덕분에 9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끝났습니다. 만나 본 적도 없는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주도에 사는 김제박(50)·이선경(45)씨 부부는 지난달 16일 미국에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지난 1월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숨진 딸 유나양의 심장을 이식받은 미국인 여성이 보낸 것이다. 미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외과 의사 마리아씨는 선천성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심장 이식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그의 쌍둥이 여동생도 같은 병을 앓다가 심장 이식을 받지 못해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씨는 A4용지 3장 분량 편지에서 "동생은 이 세상에 없지만 제 기억 속에 살아 있기 때문에 유나는 저와 제 동생 두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며 "외과의사로서 앞으로 더 많은 환자를 살리겠다"고 했다.
김씨 부부의 맏딸인 유나양은 열여섯 살 때인 2014년 미국 애리조나주로 유학 갔다가 지난 1월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사 판정을 받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간 부부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누워 있는 딸의 손을 붙잡고 당장이라도 일어나 '엄마 아빠'라고 불러주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부는 며칠 밤을 병원에서 지내며 '딸의 죽음'이라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고자 '장기 기증'이란 어려운 선택을 했다.
어머니 이씨는 "유나 손을 잡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뇌사 판정을 받은 17세 소녀의 아버지가 딸의 장기를 기증해서 여러 사람에게 새 생명을 줬다'는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며 "그때부터 '장기를 기증해도 괜찮을까' 고민하며 며칠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그런 이씨에게 남편이 "여보, 우리 유나 장기 기증…"이란 말을 어렵게 꺼냈다. 이씨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서로 말을 못 했던 것"이라고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딸도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김양의 심장과 각막 등 장기는 모두 27명에게 이식됐다.
김양의 1주기를 앞두고 애리조나 장기 기증 네트워크에서도 편지를 보내왔다. 이 단체 대변인 마르셀씨는 "유나의 장기를 이식받은 두 살 여자아이 부모가 '아이가 건강해져서 아장아장 걷는다며 모두 유나 덕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며 "기증받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끝내게 해 준 유나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장기를 기증하면 기증자와 이식자 간 대면은 물론 정보 교환도 법적으로 제한된다. 장기 매매 등을 방지한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기증자 가족은 누가 장기를 받았는지, 이식인이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뇌사 장기 기증인들을 잊지 않고 예우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4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뇌사 장기 기증인 유가족의 밤' 행사를 열기로 했다. 이날 행사에서 유나양 이야기와 마리아씨의 편지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기획실장은 "유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다른 기증자 가족도 따뜻한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어머니 이씨는 "아직까진 마리아씨 편지에 답장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딸을 잃은 슬픔을 아직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유나 얼굴이 흐릿해질 때쯤이면 용기를 내서 마리아씨에게 연락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아직도 딸이 보고 싶을 땐 편지를 쓴다. 어머니가 쓴 편지 중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제 두 달 있으면 천국 간 지 1년이 되네. 아직도 사고 소식을 접한 새벽 1시쯤은 자주 일어나 잠을 못 이룬다. 그래도 유나의 장기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누군가가 있다니 유나가 제대로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것 같구나. 장기 기증한 것 엄마 아빠는 후회 안 한다. 엄마 아빠 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