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사는 박모(30)씨는 지난 24일 고향인 대구에 가려고 열차 표를 알아보다가 ‘SRT 고객평가단’ 이벤트를 알게 됐다. 12월 9일 본격 운행을 시작해는 SRT(수서발 고속철)가 정식 개통 전 ‘무료 시승’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박씨는 “무료인데다가 출발역인 수서역도 집에서 가까워 이벤트 참가를 시도했는데, 행사가 끝나는 30일까지 모든 좌석이 매진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박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털사이트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서 ‘SRT’를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암표를 판다”는 게시물이 수십개 쏟아졌다. 판매자들은 사이트에 열차 출발 날짜와 시간만 알려주고, 구체적인 가격은 ‘쪽지’로 흥정했다. 박씨는 일정에 맞는 수서발 대구행 SRT 티켓을 2만원에 샀다. 그는 “KTX 반값에 표를 산 건 좋지만, 무료 탑승 이벤트를 ‘사재기’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다”고 말했다.
SRT 운영사 ㈜SR은 지난 14일부터 30일까지 평일에만 전 노선에서 무료 시승 열차를 운행해 탑승객들의 소감과 만족도를 조사하고 있다. 수서-부산 노선 상·하행 열차가 각각 하루 10대씩, 수서-목포 노선은 5대씩 편성했다.
시승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SRT 홈페이지나 스마트폰 앱에는 이용자들이 폭주했고, 순식간에 모든 좌석이 동났다.
그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실제 SRT를 타보면 빈자리가 많다”는 탑승 후기가 속속 올라오고 있다. 클리앙 회원 ‘theDe*****’는 “인터넷에는 다 매진이지만 정작 타는 건 3분의 1 수준입니다. 거의 안 타요”라고 썼다. 네이버 카페 ‘스사사’ 회원 ‘doubl**’는 “금요일 밤 부산행 열차는 그나마 좌석이 절반가량 차 있었다”고 했다.
무료탑승권은 매진인데, 한산한 열차 객실에 대해 네티즌들은 암표상들의 ‘사재기 피해’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예매만 하고 실제 고객이 나타나지 않는 ‘노쇼(no show)’에 대한 ‘벌칙’이 없었기 때문에 암표상들이 팔지 못한 시승권이 그대로 빈 좌석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SRT 측은 “애초 객실이 꽉 찰 수 없다”고 밝혔다. SRT 관계자는 “전체 좌석을 공짜로 풀면 KTX나 고속버스 영업에 피해를 줄 수 있기 좌석의 절반 정도만 시승 행사에 제공했다”고 말했다. 열차 1량에 70석이 있으면 35석만 이벤트용으로 제공했다는 뜻이다.
이런 설명이라면 SRT는 고객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해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SRT 이벤트 안내문에는 ‘4∼8호차 좌석 배정’이라고 적었고, 좌석 일부만 제공한다는 설명은 없었다. 이벤트 당첨 확률은 고객들의 실제 기대보다 훨씬 낮았고, 소비자들은 좌석 수가 적게 제공되는 것도 모르고 예매를 위해 과열 경쟁을 벌인 것이다.
객실의 절반만 채우고 운행하는 것은 ‘탑승객 만족도를 조사하겠다’는 고객체험단 모집 취지에도 벗어나는 것이다. 주부 김지연(39)씨는 “옆자리가 비어 있는 한산한 열차를 타면 자연히 더 쾌적하고 안락하게 느끼는 것 아니냐”며 “SRT가 정식 개통에 앞서 소비자를 상대로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말했다.
무료시승권이 암표처럼 거래되는 것은 SRT가 자초했고, 단속에 무신경하다는 지적도 있다. SRT는 고객평가단 행사를 시작하면서 1인당 예매 가능 좌석 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한 사람이 수십장의 열차표를 닥치는 대로 예매하는 ‘사재기’가 가능했고, 순수하게 고객평가단 행사 참여를 희망하던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이다.
SRT 관계자는 “암표에 대한 경고문을 게시하고 암표 관련 게시물이 발견되면 담당 업체에 연락해 게시물을 삭제하고 있다”면서 “암표와 관련해 접수된 민원이나 적발 사례는 없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