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안종범·정호성씨에 대한 검찰 공소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부터 기밀 유출, 민간 기업의 인사·납품·수주 청탁에 이르기까지 최씨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모든 것에 박근혜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대통령 업무 수행 범위를 넘어섰는지, 범의(犯意)가 있었는지 등에 대한 법적 공방은 앞으로 법률가들 몫이다. 당장은 대통령 혐의 구성에 동원된 팩트(fact) 하나하나가 충격적이다.
필자는 박근혜 정부 출범부터 올 4월까지 3년 2개월간 청와대를 출입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부터 행정관까지 많은 이가 웃으며 청와대에 왔다가 홀연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의(自意)도 있었지만 영문 모르고 짐을 싼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날이 마지막 회의인 줄 모르고 참석했거나 회의 주재 중에 방송을 보고 자기가 잘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석비서관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박 대통령을 감싸려 했다. 그랬던 그들이 공소장 내용을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소장 속 대통령은 '내가 믿었던 그 대통령이 맞느냐'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두 달 전 급성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전 수석은 작년 1월 국회 운영위에 출석하라는 김기춘 비서실장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그 전날 필자는 우연히 김 전 수석과 저녁을 같이 했다. 그 무렵 청와대에선 "비서실장이 민정수석을 배제하고 우병우 민정비서관과 직거래한다"는 말이 돌았다. 그 얘기를 꺼내려 하자 김 전 수석은 말을 돌렸다. 지난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대통령 걱정을 많이 했다. 그는 "총선에 크게 졌는데도 대통령이 강하게 나간다"고 했다. 만남이 있고 석 달 뒤 그의 부음(訃音)을 접했다. 몸속에 큰 병이 있었지만 몰랐던 것 같다.
그동안 박 대통령 주변에는 늘 "대통령이 잘돼야 한다"는 참모들이 있었다. 대통령의 '고집'에 힘들어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경질돼도 그냥 감수했다. 대통령의 첫 여름휴가 직후에 교체된 허태열 초대 비서실장도 그런 경우였다. 야당과 잘 지내야 한다는 허 실장의 입장이 박 대통령의 강성 기조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타가 김기춘 실장이었다. 대통령은 허 전 실장에게 "기자들과 통화해 인사 정보를 유출하지 말라"는 전화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안을 중시했는데 정작 최씨 쪽으로는 각종 인선안이 줄줄 샌 것으로 조사됐다. 이병기 전 비서실장도 외교·안보 분야 외에는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4월 총선 공천과 관련해 이 전 실장에게 조언만 구했더라도 그 후의 여소야대와 지금의 위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도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말 처음으로 최씨 의혹 전반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최씨가 내게 보인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며 충격에 빠졌고 이는 대국민 사과 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에게는 여러 번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침내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共犯)으로 지목되며 '탄핵'이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최순실을 빼놓고 아무도 믿지 않았던 대가가 너무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