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조선시대 팔도 관찰사나 고을의 수령을 임명할 때 출신 지역을 피하는 상피제가 적용됐다. 행정, 사법의 권한뿐 아니라 심지어 군대 지휘권까지 가질 수 있었던 조선 시대 지방관이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일하게 되면 혈연, 학연, 지연 등의 영향으로 공정하게 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오촌 조카, 어려서 옆집 살던 친구, 그리고 서당 동기가 서로 다투며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는 상황은 고을 수령에게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수 있겠다.

각 개표구의 과거 대선 투표 결과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아 거리가 멀어질수록 두 지역의 투표 성향이 어떻게 바뀌는지 살펴본 적이 있다. 옆 동네에서 많은 사람이 지지한 후보는 내가 사는 동네의 지지 후보와 거의 비슷하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10㎞, 20㎞, 100㎞로 점점 멀어지면 당연히 그곳의 득표율은 우리 동네와 달라진다. 이처럼 두 지역 득표율 간 상관관계가 거리에 따라 어떻게 줄어드는지를 정량적으로 재본 거다.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남북이나 동서 방향으로 약 80~100㎞ 정도 멀어지면 두 지역의 득표율 상관관계가 확연히 줄어드는 것을 알았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상관거리(correlation length)'라고 표현한다. 즉,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 득표율의 상관거리는 약 100㎞다.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도 이와 비슷한 정도의 상관거리를 가진다면, 이를 이용해 조선시대의 상피제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었을 수도 있으리라. 지방관의 부임지를 정할 때 출신 지역으로부터 최소 100㎞ 이상 먼 곳을 택하는 식으로.

물리학은 변화 혹은 운동에 대한 학문이다. 물리학에서 운동을 기술할 때는 보통 시간과 공간을 함께 이용한다. 조선시대의 상피제는 공간적인 의미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의 상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결정은 현재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너무나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 떨어진 두 시점 사이에도 공간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관관계를 측정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두 시점 사이의 관련 정도가 줄어드는 시간인 '상관시간(correlation time)'이 얼마나 될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국회의원이라면 상관시간이 임기 4년보다는 더 길 것임이 분명하다. 다선 국회의원도 많으니까. 사실 계산을 안 해봐도 대부분의 세상사에서 상관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예상할 수 있다. 바로 한 세대인 30년 정도, 길어야 그 두 배 정도일 거다.

나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중요한 결정은 시간 상피제를 도입해 미리미리 서둘러 토론을 시작하길 바란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좀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눈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선거가 바로 몇 달 뒤 코앞인데, 선거구 조정이 현재 국회의원들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과연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30년, 60년 뒤의 선거구 획정의 기본 틀을 지금 미리 정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교육제도의 변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3년 뒤가 아닌 100년 뒤의 교육은 어떠해야 할지를 지금 함께 고민한다면, 토론도 합의도 쉽지 않을까. 교육은 백년지계라는 말이 있으니 정말로 100년 뒤를 지금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먼 미래라면, 구체적인 것을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변화의 큰 방향만이라도 미리 의논해 합의하고 점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단계를 조금씩 조율해간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시간 상피제를 도입해 사람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먼 미래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토론을 함께할 모든 이가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거다. 난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미래를 꿈꾸는 세상을 꿈꾼다. 너무 큰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