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오후 2시 30분쯤 서울 서교동 A 아파트 맨 위층(13층)에 사는 박모(60)씨는 낮잠을 자다 천장 쪽에서 나는 "쿵쿵" 소리에 화들짝 깼다. 아랫집 이사하는 소리가 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시간 뒤 내려가 보니 아랫집은 그대로였다. 이상한 생각에 옥상에 올라가 보니 소주·맥주병 여럿과 일회용 컵,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옥상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경찰을 불러 CCTV를 확인해 보니 그 시간대에 10대 학생 여럿이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들 10대가 옥상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돌아간 것으로 추정했다. 박씨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관리실에 요청해 옥상문에 새로 자물쇠를 맞춰 잠그고 화재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옥상 문 열쇠 하나를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옥상 층에 있는 열쇠식 옥상 문의 개폐와 그 열쇠 관리에 대해 건축·소방 관련법에 아무런 강제 규정이 없어 아파트 주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작년 초등학생이 옥상에서 던진 벽돌에 맞아 1층의 여성이 숨진 '용인 캣맘 사건' 이후 옥상 문 단속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실제 법령으로 반영된 것은 미약하다는 지적이다. 경찰·소방 당국과 국토교통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옥상 문엔 딜레마가 있다. 화재에 대비하자면 잠가서는 안 되지만 범죄나 자살 시도 등을 예방하기 위해 잠가 놓아야 한다는 민원도 만만치 않다. 지난 2월 말 국토교통부는 '주택 건설 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3월 이후 신축되는 모든 아파트에 평소엔 잠겼다가 화재 경보 시 자동적으로 개방되는 자동개폐식 옥상 문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존 열쇠식 옥상 문에 대해선 평소에 잠가 놓아야 하는지, 잠근다면 열쇠를 누가 어디에 보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규정이 없다. 서울 대현동 한 아파트 맨 위층에 사는 황모(29)씨는 "옥상에 가끔 올라가 보면 어떨 땐 문이 잠겨 있고 어떨 땐 열 수 있는데, 옥상 문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몰라 만약 불이 난다면 매우 당황할 것 같다"고 말했다. 3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지난 9월 서울 쌍문동 아파트 화재 때도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경찰청 생활안전과 관계자는 "범죄 예방도 중요하지만 열쇠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현실에서 함부로 잠가 놓으라고 권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방 당국은 건축법 미비 때문에 옥상 문 개방을 강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소방시설법에 따르면 일선 소방서장은 건축법에 규정된 '피난시설'에 대해서만 그 통로의 항시 개방을 요구할 수 있는데, 아파트 옥상은 통상 이 '피난시설'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 주택건설공급과 관계자는 "기존 아파트 옥상 문을 모두 자동개폐식으로 새로 설치하라고 하기엔 설치 비용이 만만치 않고, 아파트 옥상 문에 대한 일률적인 기준을 만들면 개별 아파트 관리실에서 범죄와 화재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규정 도입이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