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종은 신하와의 독대(獨對)를 즐겼다. 여럿이 논의하면 준비 없이 왔다가 가는 신하가 많다는 이유였다. 왕조실록은 '나그네처럼 나아갔다가 나그네처럼 물러가는' 신하라고 표현했다. 세종은 게으른 신하가 싫었나 보다. 날마다 고위 관료들을 순번으로 들여 홀로 보고받고 질문했다. 이런 연쇄 독대를 '윤대(輪對)'라고 했다. 덕(德)으로 다스리던 세종대왕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왕의 독대는 금지됐다. 궁궐을 나간 신하는 독대를 호가호위의 구실로 삼는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독대의 이익보다 폐해를 훨씬 크게 본 듯하다. 청와대 비서 격인 승지가 배석하고 사관(史官)이 곁에서 왕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했다. 사관이 붓을 잡으면 왕도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신권(臣權)이 왕권을 견제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아주 드물게 예외도 있었다.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北伐)을 논의한 '기해독대', 숙종과 이이명이 후계를 논의한 '정유독대'가 대표적이다.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독대 순간부터 수많은 소문을 낳았고 훗날 정쟁의 불씨가 됐다. 독대의 '영광'을 누린 송시열과 이이명은 결국 사약(賜藥)을 받았다. 일찍이 후계 문제로 선조와 독대한 유영경 역시 권력에 의해 죽었다. 조선시대 신하에게 독대는 '독배(毒杯)'가 아니었을까.
▶세종의 경우처럼 독대를 잘 활용하면 통치에 효율적이다. 고도성장 시대 대통령들은 빠른 정책 판단을 위해 실무자를 직접 불러 독대한 경우도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같은 문제를 두고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5공식 '윤대'라고 할까. 그런데 대통령이 귀가 얇아 결국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 말대로 결정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연히 윤대의 마지막 순번 경쟁이 치열했다나. 노무현 대통령은 독대를 밀실·가신 정치의 상징처럼 여겼다. 국정원장의 주례 독대까지 없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대를 다시 시작하자 야당은 "밀실 정치 부활"이라고 비판했다.
▶그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독대' 발언이 화제를 모았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하는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무수석이 대통령과 그 정도로 불통(不通)이었느냐"는 여론의 비판이 있었다. 대통령이 그동안 얼마나 주변과 소통하지 않았으면 독대가 좋은 뜻으로 오르내릴까 싶기도 하다. 물론 지금 국민이 말하는 독대는 밀실 대화라는 부정적 뜻이 아니라 서로 마주 앉아 정책을 논의하는 소통의 방식이다. 참모와 소통하지 않으면서 비선(秘線)과는 독대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