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국가는 '인간 정신 흐트린다'는 죄명으로 음악, 영화, 문학, 미술도 통제
워쇼스키 자매가 그린 경찰 통제 국가에 등장하는 줄리 런던의 '크라이 미 어 리버'
9,473. 우울한 숫자다. 소위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숫자다. 누군가는 음모론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미 만 명에 가까운 그 리스트의 이름들이 SNS를 통해 공개되었다. 누군가의 음모론이라면 참으로 꼼꼼히 정성을 들인 역작(!)인 셈이다. 하루 동안 리스트의 이름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조금씩 더 우울해졌다.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는가는 차후의 문제다. 명단의 존재자체가 슬픈 코미디다. 도대체 지금 이곳이 서기 몇 년도의 어디인가를 되묻게 한다.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를 듣고 있다. 아름다운 곡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보컬 줄리 런던은 소위 블론드 헤어 싱어 계보에서 최상위에 올라 있는 아티스트다. 탁월한 가창력의 흑인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에 대한 일종의 대항어(對抗語)로써 사용된 블론드 헤어 싱어는 지금 생각해보면 극히 인종차별적이며 여성 비하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아티스트들을 나누던 이상한 시대도 있었다.
◆ 워쇼스키 자매가 그린 경찰 통제 미래 국가에 등장한 '크라이 미 어 리버'
‘Cry Me A River’는 스탠다드 재즈 곡이다. 흔한 곡이라는 뜻이다. 음악에 흔한 곡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지만, 쉽게 설명해 여기저기서 자주 들려지는 곡이며, 수많은 가수들이 자신만의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곡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는 독보적이다. 흑인 소울의 끈적이는 느낌이 없으면서도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을 통해 묘하게 긴장감을 만들어 낸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구성 속에서 어딘지 허무에 가득 찬 듯한 줄리 런던의 음성은 기타의 ‘Cry Me A River’를 가볍게 압도하며 단연 최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가 가장 아름답게 등장했던 영화가 있다.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이다. 영화의 배경은 강력한 경찰국가가 통제하는 미래 시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여주인공 이비는 통금시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길에서 경찰들에 의해 폭행을 당할 위기에 빠진다.
그 때,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인물 브이가 나타나 이비를 구해준다. 정신을 잃은 이비가 깨어난 것은 지하 어딘가에 있는 브이의 은신처. 이 때, 그녀를 깨운 것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한 곡의 음악이다. 짐작하겠지만, 그 곡이 바로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이다.
전제국가는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인간의 정신을 흐트러트린다는 명목 하에 영화, 문학, 미술과 음악마저도 모두 금지한 채, 오직 생산 활동에만 시민들을 전념시키려 한다. 앨런 무어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마치 2016년의 어느 우울한 나라를 연상시킨다. 영화 속에서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가 너무도 아름답게 들려올 때, 그 전제국가의 폭력성은 더욱 강조되는데, 그것이 오직 영화 속 픽션의 세계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더 우울해진다.
◆ 가장 쾌락적인 댄스 음악이 저항을 상징하는 음악이 되다
19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당시의 기성세대들은 이 시끄럽고, 기괴한 음악을 금지 시켰다. 보수적인 미국의 지역사회에서는 라디오에서 로큰롤을 틀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가 TV에 출연했을 때는 그의 현란한(!) 다리춤이 선정적이라며 카메라를 그의 상체에만 고정시켰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로큰롤을 저항의 음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로큰롤은 원래 댄스 음악이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로큰롤에 맞춰 춤을 추었다. 원래 반항과 저항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음악을 전혀 새로운 용도의 음악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바로 당시의 기성세대였다. 청춘들의 음악을 불온하다며 금지시킴으로 그들이 그 음악을 듣는 행위를 저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다. 가장 쾌락적인 댄스 음악이 저항음악으로 변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를 들으며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영화 속 어떤 시대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어쩌면 이 아름답고 감미로운 스탠다드 재즈곡마저 언젠가는 저항의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금지하는 시대엔 모든 것이 저항이고 반항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일테니 말이다.
◆ 김태훈은 음악을 듣고, 글을 쓴다. 방송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팝 칼럼니스트가 본업이다. 대부분 책을 읽고 이것저것 끄적이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2015년엔 김부겸 전 국회의원과의 대담집인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를 출간 했으며, 2016년엔 쿠바 여행기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