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명순(왼쪽)과 그가 ‘신여성’ 창간호에 발표한 소설 ‘선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탄실 김명순(1896~?)의 단편이 발굴됐다. 나혜석학술상 등을 받은 여성소설 연구자 서정자(73) 초당대 명예교수는 19일 "일제강점기 잡지 '신여성'(1923)의 초판 영인본을 최근 조사하던 중 그동안 미완(未完)으로 알려져 있던 김명순의 작품 '선례'의 나머지 부분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팔월 오후의 하늘은 구름 없이 개였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화가를 꿈꾸는 남자 주인공이 아름다운 여인 선례를 만나고, 음률과 곡조를 이미지로 구현하려 고심하는 내용의 유미주의 소설. 그간 첫 장에 '미정고(未定稿)'라 적힌 3쪽짜리 미완작으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에 그 앞부분에 해당하는 8쪽짜리 전편(前篇)이 발견돼 처음·중간·끝의 구조를 지닌 총 11쪽의 온전한 한 편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씨는 "김명순은 '영희의 일생'(1920)이나 '칠면조'(1921) 등 미완인 작품이 많아 평가절하돼 왔지만, 이번 발굴로 작가의 작품 세계 조망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선례'는 그의 첫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에선 제외돼 있다. 서씨는 그 이유를 평론가 김기진의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1924)으로 인한 심적 부담 때문인 것으로 해석했다. 공개장엔 "일개 무절조한 감상주의자에 지나지 못하였다… 지금인들 무슨 독특한 주관이 있을 듯싶지 않다" 같은 인격모독적 비판이 담겼다. 이 밖에도 김명순은 자유연애, 사회성과 거리가 먼 유미주의 등으로 인해 문단에서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서씨는 "스캔들에 휘말리자 '선(善)이 아니라 미(美)를 지향한다'는 탐미적인 이 소설을 창작집에서 제외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올해 김명순 탄생 120주년을 맞아 김별아의 소설 '탄실'이 발간되는 등 그의 문학 세계가 재조명받고 있다. 근현대문학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서울대 방민호 교수는 "김명순은 가장 활발한 근대 여성 문인이었음에도 그간 연구가 부족했는데, 이번 성과가 향후 연구에 탄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씨는 22일 전남 목포문학관에서 세미나를 열고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