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원 오페라 평론가

유럽 대도시엔 대개 두 개의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하나는 크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며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드나들던 극장으로 모든 오페라를 원어(原語·대개 이탈리아어) 그대로 공연한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 수수하고, 가사를 자국어로 번안해 불렀다. 음악은 조금 어색할지 몰라도 내용은 이해하기 쉬워서 여러 계층이 한데 어울려 공연을 봤다. 빈의 국립 오페라와 민중 오페라, 런던의 로열 오페라와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가 그렇게 공존하며 발전했다.

베를린에도 두 개의 극장이 있었다. 원어로 공연하는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엔 프로이센 왕실 귀공자나 히틀러와 괴벨스 같은 나치 지도자들이 들락거렸다. 코미셰오퍼(코믹 오페라)는 모든 작품을 독일어로 했고, 베를린 시민과 지식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 여파로 독일이 분단됐다. 수도 베를린도 동서로 양분됐다. 베를린 서쪽은 미국·영국·프랑스 자유 진영이, 동쪽은 소련이 분할 통치했다.

문제는 주요 역사·문화 시설이 모두 동베를린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유서 깊은 건축물과 궁전, 박물관, 국립도서관, 대학교와 콘서트홀, 오페라하우스 두 곳 등이 죄다 동쪽에 있었다. 서베를린에 남은 거라곤 주택가와 쇼핑센터뿐. 게다가 1961년 8월 기습 설치된 베를린 장벽은 동베를린으로의 접근을 원천 봉쇄해 버렸다. 서쪽에선 부랴부랴 새 오페라하우스와 새 콘서트홀을 지었다. 베를린 도이체오퍼(독일 오페라) 극장과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그때 생겨난 것들이다.

베를린 코미셰오퍼.

['문화도시' 베를린은 어디?]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왔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감격했지만 공연 애호가들은 특히 만세를 불렀다. 통일 덕에 베를린이 졸지에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가 된 것이다. 동서 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가 합쳐져 모두 세 개가 됐고, 양쪽에서 제각각 성장해온 오케스트라만 무려 일곱 개였다. 지금도 베를린에선 매일 밤 쉴 새 없이, 주말엔 밤낮으로 오페라와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분단의 아픔이 가져온 아이러니이기도, 쉬지 않고 문화를 가꿔온 독일인들의 지혜와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