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10월 초가 되도록 꼼짝 않던 더위가 순식간에 물러섰다. 아침저녁뿐 아니라 낮에도 부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이제야 가을이다 싶다.
가을이면 갈대밭이 그립다. 차를 몰아 서천으로 간다. 전국 4대 갈대밭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신성리 갈대밭에선 시야 가득 갈대가 출렁인다. 가을 하늘 높이 연이 치솟았고, 갈대밭 군데군데 억새꽃은 노을빛을 사방으로 튀어내며 하얗게 빛난다. 갈대 사이를 걷다 크게 들이마시는 가을 공기가 상쾌하다.
내친걸음, 군산까지 다녀왔다. 금강을 경계로 서천과 마주한 도시다. 최근 '시간여행 축제'를 열기도 했던 군산은 예스러운 풍경으로 숱한 영화의 러브콜을 받았던 도시다. 군산내항 주변으로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이 즐비하고, 원도심의 정겨운 간판들은 향수를 자극한다. 1930년대 군산을 묘사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를 읽고 가면, 그때의 풍경이 절로 현재 모습 위로 겹친다.
맛만으로 오랜 세월을 버텨낸 군산의 맛집들, 지난 6월 정식 개장한 장항스카이워크와 세계 5대 기후대를 탐험할 수 있는 국립생태원은 이번 가을 여행의 덤이다.
세월의 흔적 간직한 군산
길이 1841m 금강 하굿둑을 건너 군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바다에 몸 섞을 채비를 끝낸 금강이 가을 하늘 아래 숨 고르듯 유유히 흘렀다. 강허리로 드러난 진흙 갯벌이 넓고, 물은 탁하다. 전북 장수에서 발원한 금강이 장장 400여㎞를 흐르다 생을 마감하는 자리다.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는 금강의 하류. 군산에서 태어난 소설가 채만식은 기나긴 금강의 여정 속에서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고 썼다.
소설 ‘탁류’를 길잡이 삼아 군산을 찾았다. 이 장편소설은 36세 채만식이 조선일보에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연재했다. 쇠락한 선비 집안의 딸 초봉이를 중심으로 당시 사회상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 소설 서두에 하늘에서 내려보듯 금강을 묘사한 채만식의 시선은 이내 아찔한 속도로 지상에 내려와 군산항으로 파고든다. 초봉이의 아버지 정 주사가 싸움에 휘말린 미두장에 도달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
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한 군산근대역사관 3층에서 이름도 낯선 미두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미두장 본래 이름은 미곡취인소. 현물 없이 쌀을 거래하는 선물거래소로, 일본이 가격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했다. 군산근대역사관이 재연한 미두장엔 책걸상이 열을 맞춰 서 있고 맨 앞엔 오사카와 인천부, 군산부 등의 미곡 시세를 적은 칠판이 걸려 있다.
시골 학교 교실처럼 보이는 외양과 달리 당시 미두장은 미곡 시세 등락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투기의 장이었다. 숱한 미두꾼들이 몰려들었다 가산을 탕진했다. 정 주사도 그중 한 명이다. 돈이 없어도 “담배나 아편의 인에 몰리듯이 미두장에를 가보기라도 않고서는 궁금해 못 배긴다”.
채만식은 이 미두장이 “군산의 심장”이라 했다. 미두장을 심장으로 둔 군산은 쌀 수탈항으로 성장했다. 군산 미곡취인소는 비록 철거되고 없으나 군산근대역사관 주변으로 그때 흔적이 흥건하다. 탁류의 등장인물들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는 장미공연장과 거대한 태극기가 그려진 옥션196은 당시 미곡 창고였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폐철로 위로 화물기차가 오가며 쌀을 수송했을 것이며, 관광객이 사진기를 들이대는 부잔교 위로는 조선인들이 쌀가마니를 지고 날랐을 것이다.
군산의 심장 가까이에서 “서로 호응하듯 옹위”한 은행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군산근대미술관은 옛날 제18은행이었으며, 군산근대건축관은 조선은행 군산 지점이었다. 수표 위조로 돈을 모아 초봉이와의 결혼을 계획하는 사기꾼이자 난봉꾼 고태수가 다닌 곳이 바로 조선은행이다. 기실 그의 허세 많은 성격과 조선은행의 건축양식은 서로 닮았다. 건립 당시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조선은행은 2층의 기능이 거의 없음에도 건물을 2층으로 올렸으며 지붕부도 높게 구성했다. 1980년대 예식장으로 쓰이다 나이트클럽이 들어선 적도 있으니, 그 파란만장함도 고태수의 인생을 닮았다.
“망망한 전주평야의 하유일망 5만석이 내다보이는 것이 1정보에 4.5원이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한국에 이주하라”는 선전에 일본인은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다. 1899년 조선인 511명, 일본인 77명에 불과했던 군산 인구는 38년 뒤 각각 3만2399명, 1만255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조선인은 일본인의 3배에 달했으나 이들은 개복동이니 둔뱀이니 “급하게 경사진 언덕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을 짓고 살았다. 반면 일본인은 “제법 문화도시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에 둥지를 틀었다. 군산내항에서 해망로를 건너면 나타나는 영화동과 월명동, 신창동 일대가 그곳이다.
초원사진관, 고우당, 이성당
그때 바둑판 모양으로 잘 구획된 길은 지금도 여전하다. 다만 이 구역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서 이젠 색이 바래거나 페인트칠이 벗겨진 간판의 가게들로 빼곡하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은 초원사진관도,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라는 이성당도 이곳에 있다. 그 끄트머리 즈음에서 게스트하우스 고우당과 신흥동 일본식 가옥을 만날 수 있다. 고우당은 1920년대 일본식 건축물을 복원한 곳으로 일본식 가옥 총 열 채가 연못과 정원을 둘러쌌다. ‘히로쓰 가옥’이라고도 불리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당시 부유한 일본인들이 어떤 공간에 살았는지 잘 보여준다. 널찍한 다다미방 앞으로 아담한 정원을 품은 모양새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군산 여행의 종착지는 금강 하굿둑 언저리에 자리한 채만식 문학관이다. 그곳 2층에서 다시, 진흙 갯벌과 탁한 금강을 마주친다. 자연히 탁류의 등장인물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들은 ‘탁류’ 같은 욕망에 휩쓸려 씁쓸한 말로에 이른다. 이들을 지켜보는 채만식의 시선은 연민과 냉소가 섞여 복잡하다. 그러나 곡절 많은 생이 다만 이들이 품은 욕망 탓일까? 이 물음에 채만식은 회의를 품는다. 그가 군산을 거인에 빗댈 때, 사람은 그저 돈과 물화를 따라 흩어졌다 모인다고 쓸 때, 사람은 욕망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그가 몸담은 시간에 휩쓸리는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질문은 채만식 본인도 피해갈 수 없다. 채만식 문학관은 채만식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다. 1947년 집필한 자전적 소설 ‘민족의 죄인’에서 “한 번 살에 묻은 대일 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장화였다”라 썼다고 기록한다. 마흔아홉 짧은 생 동안 중장 15편을 남긴 채만식이 “불행한 결혼, 가난,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1950년 6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한다. 문학관 2층엔 그가 임종을 맞은 집을 찍은 사진이 있다. 기둥이 휜 초라한 초가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