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봤을 거다. 빅뱅, 싸이, 2NE1, 이하이. 멋있네? 하고 지나친 이들의 앨범 재킷.

모두 장성은 디자이너의 결과물이다. YG엔터테인먼트의 디자인 외주업체에서 일하던 그는 양현석 대표의 적극적인 스카우트 제의로 YG에 합류했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런 그가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건 반전.

아직까지 생소한 개념이다. 엔터테인먼트 디자이너. 쉽게 말해 앨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장성은 디자이너가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은 그저 CD 패키지 디자인 정도의 의미였다. 장 디자이너가 YG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이후 이 같은 기존의 개념에 혁신이 일었다. 그는 앨범 재킷에 가수의 정체성을 담기 시작했다. 이후 그가 만드는 앨범 콘셉트에 따라 가수의 프로모션 방향이 정해지기도 했다. 일례로 2012년 발매한 빅뱅의 미니앨범 포스터를 들 수 있다. 오랜만에 컴백하는 빅뱅의 상황을 ‘동면에서 깨어남’이라는 콘셉트로 표현했다. 이는 빅뱅의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프로모션의 전 영역으로 확대됐다. 지드래곤의

앨범을 GD의 얼굴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앨범 작업 전에 저한테 키워드를 줘요. 구체적으로는 아니고요, 몇 가지 인포메이션을 줍니다. 예를 들어 빅뱅 지드래곤의 같은 앨범의 경우 ‘주제는 쿠데타이고, 빨간색으로 갔으면 좋겠다’라는 정도로요.”

그때부터 장 디자이너의 고민이 시작된다.

“제가 보기에 쿠데타라는 이미지도 센데, 거기다 빨간색으로 표현하라니 너무 세다는 느낌이었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자극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건가. 그때 역발상으로 ‘피스(peace)’ 마크를 떠올렸어요. 쿠테타인데 웬 평화?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음악으로 정복하겠다는 게 결국 음악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피스 마크를 넣었는데 그 안에 ‘GD’라는 알파벳이 있더라고요.”

빅뱅뿐만이 아니다. ‘강남스타일’ 당시 싸이의 앨범도 그의 손을 거쳤다. 싸이의 악동 이미지를 떠올리며 앨범을 장난감처럼 만들었다. 2NE1 앨범을 통해서는 ‘기존 걸그룹과 차별되는 미래지향의 개성 강한 4명의 걸그룹’이라는 정체성을 만들고, 피라미드 4개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4명의 멤버들을 시각화했다. 이하이의 앨범은 당시 열여섯이었던 소녀 느낌의 아티스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화장품 패키지처럼 디자인했다.

몰라서 더 용감했다

그렇게 YG엔터테인먼트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억대연봉자가 됐다. 그런 그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월급이 80만원에 불과했다. 첫 직장은 ‘지직(GIGIC)’이라는 디자인 에이전시. 지금이야 큰 회사가 됐지만, 그가 입사할 당시에는 대표이사를 제외한 직원은 단 1명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회사였어요. 그때 마음가짐을 어떻게 했느냐면, 하나하나 배운다는 생각이었어요. 회사에 대표이사랑 저밖에 없는 상황을 비관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내가 일을 잘하면 대표에게 바로 점수를 딸 수 있어서 좋고, 일대일로 일을 배울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고요.”

그렇게 그곳에 10년 동안 있었다. 로고, 애플리케이션, 브로슈어, 패키지, MD, 엔터테인먼트, 잡지 편집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지만 디자인의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지직에서의 그의 결과물은 시나브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중 한 명이 양현석 대표였다. 지직 퇴사 이후 양 대표에게서 몇 차례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 몇 차례 고사와 설득이 오갔고, 결국 합류하게 됐다. 장 디자이너는 현재 새로운 도전을 위해 YG엔터테인먼트를 나와 ‘MA+CH’라는 회사를 설립한 상태다. 음악(Music), 예술(Art), 문화(Culture), 사람(Human)을 망라한, 더 큰 범위의 일을 하는 곳이다.

“디자인을 하면서 잃지 않았던 생각은 ‘상대를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됐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아티스트는 그림에 자기 이름으로 사인을 해서 표식을 남겨요. 다른 사람이 따라 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디자이너는 사인을 하지 않죠. 예를 들어 디자인 가구라고 하면, 그냥 작업을 할 뿐이에요. 아, 디자이너는 나를 숨기고 상대방을 돋보이게 하는 거구나. 나를 철저히 숨기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그는 말하자면 ‘정식 코스’를 밟은 디자이너는 아니다. 말마따나 덜컥 디자이너가 됐다.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요, 디자이너가 될 생각이 없는 상태로 대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들어간 대학교(한동대)는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입학하는 곳이었어요. 2학년 때 전공 2개를 선택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학교여서 학과가 막 생기던 때쯤이었는데, 다른 수업들은 너무 졸리더라고요. 교양수업으로 산업디자인 개론을 듣게 됐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수업시간에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다가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렇게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게 됐고 교수와 상담도 하면서 적성을 찾은 겁니다.”

그는 “그전까지 완전히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열의를 가지고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라면서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면서 도전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도전하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다”라고 했다.

소명의식이 나를 이끌다

지난 9월 5일, 조선뉴스프레스가 주최한 ‘청춘수업’ 현장에서 만난 장성은 디자이너는 강당을 메운 대학생들에게 “내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소명의식’을 갖고 일한 게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인다, 멋져 보인다고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소명 없이 일을 하면 허무해질 수 있어요. 열심히 했는데, 슬럼프가 온다고 하잖아요.  이걸 왜 해야 하는지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일에 대한 소명을 찾고 그전에 나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거죠. 예를 들어, 미용사의 경우에는 단순히 남의 머리를 잘라준다, 이게 아니라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 같아요. 카센터 같은 경우도 단순히 손에 기름을 묻히고 타이어를 갈아주는 사람이다, 이게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결과가 달라요. 소명의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죠.”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