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학교 3학년이었던 A양은 과학 과목 수행 평가로 조별 실험을 하게 됐다. 제비뽑기를 통해 다섯 명이 한 조로 배정받았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머지 학생이 모두 외국어고 지망생이라 과학 공부를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었던 것이다. 외고는 신입생 선발 시 교과 성적을 영어만 반영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보자"는 A양의 말에 한 학생은 "우리는 다른 과목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며 "대충 꾸며 내도 기본 점수는 받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나서느냐"고 짜증을 냈다. 결국 최상위권이었던 A양이 전전긍긍하다가 혼자서 실험 설계부터 관찰, 결과 도출, 보고서 정리까지 다해냈고, 다섯 명은 똑같이 만점을 받았다.
…
◇한 명이 다 하고 모두가 만점 받는 '무임승차'
지난 4월 교육부가 '학교생활 기록 작성 및 관리 지침 일부 개정안'에 따라 중·고교 수행 평가 비중을 지금보다 늘리겠다고 발표하면서 학생들의 한숨이 늘고 있다. 수행 평가 가운데 여러 학생이 하나의 과제를 완수하는 '팀별 과제'도 덩달아 증가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팀 과제는 사회성과 리더십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를 수행하는 단계에서 무임승차·왕따 등 각종 부작용이 일어난다.
팀 과제에서 팀원은 대체로 제비뽑기나 출석번호 순으로 배정된다. 그야말로 운(運)에 맡겨야 한다. 학업에 열의 있는 친구와 한 팀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소수가 남의 몫까지 떠안는 일이 흔하다. 고교 3학년인 B양은 지난해 수행 평가 과제인 영어 연극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팀원인 4명이 전혀 참여하려 하지 않아, 작품 선정부터 대본 작성, 소품 제작까지 혼자 다 했다. 팀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의 대사마저도 외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B양은 "2주가 넘도록 한 명씩 밥과 간식을 사줘 가며 어르고 달래 암기시킨 끝에 겨우 시험을 마쳤다"고 기억했다. 서울 강남에서 학생부종합전형 컨설팅 학원을 운영 중인 원장 C씨는 "교과 성적이나 개인 과제는 미리 준비하면 잘할 수 있지만 조별 과제는 학업을 포기한 아이가 팀에 포함되면 소위 망하는 것이다. 학원에서 도와주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했다.
◇남학생 기피… 학부모 간 싸움도
팀별 과제는 여학생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남학생 기피 현상도 나타난다. D양은 "성적에 관심 많은 여학생이 과제를 떠안는 일이 잦다"며 "제비뽑기할 때 남학생과 한 팀에 배정되면 큰 탄식이 나올 정도"라고 했다. 체육 등 예체능 과목에선 "마음 맞는 학생끼리 조를 짜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땐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학생은 조원으로 받아주지 않거나 따돌림도 당한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다. 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 E씨는 "우등생 부모가 팀 과제에 소홀한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해 '우리 애 앞길 망치려고 과제를 안 하느냐'고 해 싸움이 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교사들이 단체 점수와 별개로 개인 점수를 주거나 팀원들이 서로를 평가하도록 하는 등 여러 보충 수단을 동원하지만, 학생들은 달라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반응이다. 학부모 F씨는 "마음 약한 아이들은 팀원 평가에서 남의 점수를 못 깎는다"며 "라이벌에게 일부러 낮은 점수를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고교 교사 H씨는 "여러 명이 힘을 모으면 가끔 대학생 뺨칠 만큼 수준 높은 결과물이 나온다"면서도 "이 과정을 점수화해 논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일을 혼자 다 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우등생들도 있어요. 그럴 땐 '대입 자기소개서 3번(학교생활 중 협력 등을 실천한 사례)'에 쓸 거리를 만들었으니 좋지 않으냐고 위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