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충북 청주 예술의전당 앞마당. 오래된 책을 펼쳐 뒤집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한옥 지붕도 닮은 높이 12m 거대한 가설 건축물에 크레인을 탄 사람들이 빨간 페인트로 선을 그었다. 총 다섯 차례 10명이 올라 빨간 선 다섯 개를 그리자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책 옆부분에 다섯 개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매는 전통 제본 방식)으로 만든 책 모습이 드러났다.

크레인에 오른 인물 가운데엔 까만 중절모를 쓴 외국인이 있었다. '직지(直指) 파빌리온'이라 이름 붙은 이 설치물을 만든 영국 출신 스타 디자이너 론 아라드였다. "기획자가 구텐베르크만 알고 자라온 서양인인 제게 직지란 게 있다는 거예요.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거라더군요. 참여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크레인에서 내려온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옆엔 영국에서 온 또 다른 유명 디자이너가 있었다. 건축 거장 리처드 로저스의 아들로 퐁피두센터, 테이트모던의 내부를 디자인한 에이브 로저스였다.

지난 3일 크레인을 탄 디자이너 론 아라드(오른쪽)와 에이브 로저스가 청주 예술의전당에 설치된 책 모양 설치물 ‘직지 파빌리온’에 빨간 선을 긋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예술가들이 지방 소도시 청주로 모였다. 청주시에서 여는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의 주제 전시로 기획된 '직지, 금빛 씨앗'전(8일까지)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배병우, 안상수, 최정화, 이이남 등 국내 유명 작가와 남아공 출신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 등 11개국 35개팀이 참여했다.

지구 반대편 작가까지 빨아들인 거대한 힘을 지닌 자석은 '직지'였다. 정식명칭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 직지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다. 서양 최초 인쇄 서적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남아있다.

이번 전시는 직지에 담긴 창조 정신을 현대 예술로 풀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회화부터 영상까지 직지에 영감받은 예술 작품이 전시장을 수놓는다. 직지코리아 총감독인 작가 전병삼이 반투명 플라스틱 상자 8200개로 만든 '직지 월(wall)'이 설치됐다. 전시장 외벽엔 디자이너 안상수가 그리스어 첫 글자 'α(알파)'와 한글 마지막 자음 'ㅎ(히읗)'을 연결한 조형 작품이, 유리창엔 필 돕슨과 브리짓 스테푸티스가 만든 그래픽 작품 '구텐베르크 갤럭시'가 붙었다.

재영(在英) 큐레이터로 전시를 기획한 김승민씨는 "직지를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금빛 씨앗으로 봤다"며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직지가 주는 가르침과 기술적 가치를 예술로 되짚어본 전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