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입니다. 세상이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그런데 젊은 작가들은 앉아서 도 닦는 소리나 해요. 이 늙은이도 답답해서 이렇게 펄떡대는데." 서울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작가 김구림(80)이 삽으로 흙을 퍼 담으며 개탄했다. 검은 흙 군데군데 토막 난 아이 시신처럼 만든 조각물이 박혀 있다. 천륜 저버린 잔혹한 범죄를 빗댄 작품이다. 그는 이 갤러리에서 30일부터 개인전 '삶과 죽음의 흔적'을 연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구림은 요새 가장 바쁜 작가 중 하나다. 지난 19일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0주년 특별전에선 설치물 위에 올라가 가부좌 틀고 46년 전 했던 퍼포먼스 '도(道)'를 재현했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겠다"며 여든의 작가는 의지를 불태웠는데, "체통 지키시라" 주위 사람이 말려 살구색 팬티 하나만 걸쳤다.
[[키워드 정보] 아방가르드 (avant-garde)란?]
해외 무대에서도 종횡무진. 현대미술의 중심 무대인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선 몇 해 사이 세 차례나 그를 선택했다. 2012년 'A Bigger Splash'전에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거장들 사이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해 9월엔 국내 최초 실험영화로 꼽히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년)가 테이트 모던에서 상영됐다. 지금은 소장품전인 'The Disappearing Figure'전에 회화 '태양의 죽음'(1964년)이 전시 중이다. 그런 와중에 서울 연남동 '플레이스 막' 같은 작은 대안공간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주류와 비주류가 어딨나. 작가가 무대를 가려선 안 된다'는 신념이 돈키호테 같은 행보를 이끌고 있다.
인생 자체가 전위 예술이다. 대구의 한의사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 지방 미대에 진학했지만 바로 자퇴했다. 대신 미군 부대를 돌며 얻은 라이프지, 타임지 같은 잡지에서 미술을 배웠다. "빗자루로 쓸고, 바닥에 물감 줄줄 흘리고, 수백 장씩 찍어내는 게 예술이었어요. 잭슨 폴록, 앤디 워홀이었던 거라." 상아탑에선 가르치지 않던 현대미술을 실시간으로 독학했다. 1969년 미술·문학·무용계 인사들을 아울러 '제4집단'이란 아방가르드 예술 단체를 조직했다. 1970년엔 서울 한양대 건너편 살곶이다리 근처 강둑에 불을 질렀다. 한국 최초의 대지(大地) 예술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였다. 당시 '미친놈' 소리 듣게 했던 이 작품은 올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현됐다. 한때 고국을 등졌다. 고졸 작가에 문턱 높은 우리 미술계에 신물 나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2000년 옛 문예진흥원(아르코)에서 귀국전을 열며 국내 화단으로 복귀했다.
노년에 이르러 예술 인생에 가속도가 붙은 이유를 묻자 "내가 계속 작품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갈수록 어지러운 세상이 이 노인을 작품 하게 만든다"고 했다. 흰 머리칼 휘날리며 핏대 세우는 노(老) 작가의 오른손 엄지엔 꿰맨 자국이 선명했다. 얼마 전 조각을 만들다가 절삭기에 다쳐 얻은 '훈장'이랬다.
늘 멈추지 않는 그를 두고 "전천후 작가지만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어떻게 똑같은 작품을 할 수 있어요. 난 체질적으로 점 하나 찍으면서 평생 작품 하나로 우려먹는 작가는 아니오." 그가 항변했다.
"내 작품은 어차피 팔릴 작품이 아닌데 새로운 건 계속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방법은 딱 하나, 오래 사는 길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스스로 '술 못 마시는 사람'이 됐지요." 예술에선 온갖 모험 다 했지만 일상에선 '절제'를 앞세우는 노년의 작가가 질끈 머리를 다시 묶었다. 전시 10월 16일까지. (02)541-5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