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은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돌아가니까" 서울역(당시 경성역)이 좋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하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무작위로 어깨를 부딪치고 간다. 떠나온 곳과 가야 할 데를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곳도 서울역이다. 노숙자 중 한 명이 '좀비'로 변한다 한들 누가 눈치를 채겠는가.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17일 1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의 하루 전날을 그린다. 전사(前史)를 다룬 '프리퀄'로 알려져 있지만, 좀비라는 소재 말고는 이야기의 연관성은 크지 않다. '서울역'은 '부산행'에서 낼 수 없었던 감독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만든 작품에 가깝다.

심한 상처를 입은 노숙자가 서울역 지하도에 쓰러진 가운데, 집을 나온 혜선(심은경)은 여관에서 동거하던 남자 친구 기웅(이준)과 싸운다. 기웅은 혜선에게 성매매를 알선하려고 했다. 혜선과 기웅이 헤어진 뒤, 혜선의 아버지 석규(류승룡)가 기웅을 찾아오고 이 둘은 혜선을 찾아다닌다. 서울역 일대에서 사람을 공격하는 '감염자'들이 속출한다.

연상호 감독은 양지보다 음지를 다루는 데 더 능하다. 좀비가 본격 등장하기 전 펼쳐지는 서울역의 풍경은 세밀한 필치로 그린 풍속화에 가깝다. 특히 노숙자들의 생활 방식이나 서울역 근처 여관, 쪽방을 전전하는 이들의 묘사는 건조하고 날카롭다. 좀비를 피해 서울역 인근을 맴도는 혜선과 노숙자는 "집에 가고 싶은데 갈 집이 없다"면서 부둥켜안고 울어버린다.

인간의 살과 피를 원하는 좀비만큼이나 인간은 돈과 욕망을 좇는다. '부산행'과 마찬가지로 좀비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 강도는 훨씬 살벌하다. '부산행'이 보여준 순진한 가족주의가 영 못마땅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편하게 보긴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인 '서울역'이 실사영화인 '부산행'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