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세현(32)씨는 얼마 전 해외 스트리트 패션 사진을 보다가 한 외국인 여성이 들고 있던 가방에 눈길이 꽂혔다. 커다란 가죽 가방에 어지럽게 새겨진 캐릭터와 말풍선. 무심하고도 발랄했다. 김씨는 백화점과 온라인 쇼핑몰, 해외 직구 사이트까지 다 뒤졌지만 똑같은 가방을 구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국내 한 편집 매장에서 그는 왜 그 가방을 구할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매장에서 팔고 있던 건, 가방이 아니라 가방에 붙어 있던 말풍선과 캐릭터 스티커 패치. 사진 속 여성은 영국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가 만든 스티커 패치를 사다가 가방에 붙여서 '나만의 가방'을 만든 것이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소비 심리가 강해지면서 패치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패치는 '구멍 난 데를 때우거나 장식용으로 덧대는 데 쓰이는 조각'이라는 뜻. 패션용어로는 옷에 장식적인 용도로 붙이는 헝겊 조각이나 가죽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재킷이나 스웨터 등 해지기 쉬운 팔꿈치에 가죽을 덧댄 패치 장식으로 친숙하다. 천을 기운 듯한 패치 디자인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누더기 패션'이라 불릴 정도로 호불호가 강한, 소수의 취향이었지만 이제는 명품 브랜드에서도 내세울 만큼 대세가 됐다.
벌·나비·꽃… 자수 패치로 부활한 구찌
지난해 디자이너가 바뀌면서 전 세계 패피(패션 피플)들 사이 폭발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구찌는 이번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두드러진 패치 장식을 선보였다. 생동감 있게 꿈틀대는 용 모양 자수 패치가 붙은 코트부터 벌·나비가 붙은 남성 클러치백까지 파격이다. 시작은 여성용 핸드백 '디오니서스'였다. 올해 봄·여름 컬렉션으로 구찌는 기존 디오니서스백에 벌·나비·꽃 등의 자수 패치를 붙여 새롭게 선보였다. 인기가 거세지자 구찌는 지난 5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구찌 플래그십스토어에서 다양한 자수 패치를 조합해 자기만의 가방이나 옷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DIY(Do It Yourself) 서비스'까지 선보였다. 구찌 관계자는 "기존 디오니서스백을 가져와도 다양한 자수 패치를 활용해 나만의 백으로 리폼할 수 있어 큰 인기"라며 "현재 DIY 서비스는 밀라노 구찌 플래그십스토어에서만 가능하지만 전 세계 주요 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패션 브랜드 홍수 속에서 가볍게 붙이는 것만으로 나만의 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패치 열풍이 거세다"며 "나만의 맞춤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DIY 서비스,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맞춤형 주문 제작) 서비스를 앞다퉈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패치 열풍의 시작을 안야 힌드마치의 스티커 패치로 꼽는다. '남들이 다 가진 평범한 핸드백이 싫다면 스티커를 붙여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안야 힌드마치는 눈알 모양, 스마일 얼굴 등 팝아트적 요소가 강한 가죽 스티커 패치를 선보이면서 단숨에 '워너비 브랜드'로 떠올랐다. 스티커 패치 1장당 10만원 안팎인데 청담동 분더샵에서는 없어서 못 판다. 국내 공식 출시도 안 됐던 안야 힌드마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신세계인터내셔날이 국내 독점 판권을 인수했을 정도. 이달 말 갤러리아백화점 내 첫 단독 매장이 입점하며 훨씬 다채로운 스티커 패치를 선보일 예정이다.
김영 신세계인터내셔날 홍보팀 과장은 "안야 힌드마치 스티커 패치는 장인들이 질 좋은 가죽을 이용해 만든데다 유머러스한 디자인이 결합돼 젊은층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라고 말했다. 10만원대 고가의 패치 장식은 '스몰 럭셔리' 소비 심리와 맞물려 패치 열풍에 더욱 불을 붙였다. 직장인 김소영(31)씨는 "1000만원짜리 명품백은 못 사도 10만원에 나만의 특색 있는 가방을 만들 수 있다니 패치 값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고루한 자수 장식? 나만의 '작은 창조'
다양한 패치 장식 중에서도 명품 브랜드에서 인기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자수 패치와 와펜 패치다. 와펜은 주로 재킷의 가슴이나 모자 등에 다는 방패 모양의 기장(記章)이나 장식이다.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대표되는 자수와 서양 귀족들 상징이었던 와펜은 명품 브랜드와 궁합이 잘 맞는다. 미우미우는 이번 가을·겨울 컬렉션 옷에 실제 영국 귀족들의 이름을 새긴 와펜 장식을 붙여 '귀족적인 브랜드'를 강조했다. 홍학·사슴·말 등 동물 와펜 장식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는 지난 7월 20일 청담동에 미우미우 부티크를 오픈하며 12가지 패치 중 선택해 자신만의 가방을 만들 수 있는 '커스터미우제이션' 이벤트를 열고 있다.
패치는 키치한 팝아트적인 요소나 키덜트적인 성향과도 조화를 이룬다. 화려한 자수무늬로 잘 알려진 돌체앤가바나는 이번 가을·겨울 컬렉션으로 월트 디즈니의 동화 캐릭터를 자수 패치로 붙인 옷들을 선보였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속 거울, 일곱 난쟁이 등의 자수 패치가 달린 원피스, 스웨터 등이 소녀 감성을 자극한다.
패치 열풍은 자매 격인 패치워크(patchwork·작은 천 조각을 꿰매 붙이는 것)로까지 번지고 있다. 버버리는 지난 2월 '패치워크'를 테마로 다양한 여성 컬렉션 옷과 액세서리를 선보였다. 그중 '패치워크 백'은 소가죽·뱀피·스웨이드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 질감의 가죽으로 이어붙인 가방이다. 패치 장식으로 나만의 백을 갖고자 하는 소비 심리와 일맥상통하면서 인기다.
패션트렌드 정보업체 '말콤브릿지' 김소희 대표는 "요즘 소비자들은 '작은 창조'를 즐긴다. 인스턴트 라면에도 무언가를 추가해 자신만의 라면을 만들어 먹는 것처럼 패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청바지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찢거나 패치 장식을 붙여 인터넷에서 공유하죠. 키치(kitsch)할수록 매력이 넘칩니다. 이런 하위 문화가 하이패션에도 영향을 끼쳐 201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키치한 DIY패션 스타일이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패치 열풍은 계속될 듯하다. 새로 산 옷을 입고 나갔다 똑같은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 당장 갈아입고 나가는 것처럼 나만의 옷, 나만의 가방을 찾는 여성들 심리는 만고불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