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노릇 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아. 더 중요한 공부는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무엇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무엇이 사람들을 괴롭히는지를 재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야. 아주 어려운 공부지. 말하자면 눈치가 빠르고, 눈치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야.'
김훈 소설 '개'의 주인공인 진돗개 보리는 "개 노릇엔 눈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물 중 눈치가 유난히 빨라서일까? 개는 반려동물로 항상 1순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개와 함께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애견 VS. 비애견 축이 팽팽히 맞서 눈치를 봐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지는 수도 상당하다. 개와 공생하는 묘법은 없는 걸까?
30대 싱글, 자녀 없는 부부가 선호
농림축산검역본부가 지난 5월 발표한 '2015년도 동물보호·복지관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반려동물 사육 가구 비율은 21.8%다. 이 중 30대 1인 가구 또는 부부로만 구성된 1세대 가구 비중이 각각 26.9%, 30%로 가장 높았다. 전체 반려동물 중 반려견은 512만마리로 추산된다.
서울 도곡동 사는 싱글족 김세준(42), 변세이(34)씨도 1인 가구로 각자 반려동물을 키운다. 변씨는 가족과 함께 살다 반려견 푸들 '세나'와 함께 독립했고, 김씨 역시 독립한 뒤 최근 셔틀랜드 쉽독 '레이'와 믹스견 '춘장'을 차례로 입양했다. "레이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 한쪽을 심하게 다쳤던 아이예요. 친구가 하는 동물병원에 주인이 안락사를 시켜달라며 맡겼는데, 다른 곳은 모두 멀쩡해 차마 안락사시키지 못하고 친구가 4년 정도 병원에서 키우던 것을 제가 데리고 왔죠."
변씨의 반려견 세나는 올해로 열다섯 살. 2000년대 초반 애완견 키우는 게 붐이었던 '퍼피붐 세대'인 변씨는 친구들과 함께 유행처럼 세나를 입양했다. "세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게 아니라 가족"이라고 강조하는 변씨는 주변 반려견들이 나이 들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요즘 반려견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김세준씨는 레이와 춘장을 입양하며 라이프 스타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장시간 외출이 쉽지 않다. 여름휴가도 고민만 하다 놓쳤다. 그래도 김씨는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반겨주는 녀석들을 보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결혼하지 않고 반려동물만 키우는 싱글족이 늘면서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일부 시각에 대해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반려견 키워보기 전에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이를 낳아도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요즘 SNS는 '개캉스'로 도배 중
올여름 바캉스에서 이슈가 된 말은 '개캉스'였다. 개를 데리고 바캉스 다녀온 사진들만 봐도 열풍을 실감한다. 아예 반려견을 '또 다른 나'처럼 주인공으로 삼은 인스타그래머도 적지 않다. 해운대 야경을 등지고 선 포메라니안 '달리'부터 캠핑을 즐기는 몰티즈 '햇님이'까지 전국 방방곡곡 인기 여행지에서 포즈를 취한 개 사진들은 팔로어들을 열광케 했다.
개캉스 명소가 된 반려견 동반 호텔과 펜션들은 예약률이 치솟았다. 애견 펜션인 경기도 가평의 '애프터눈 가든'이나 태안 안면도의 '개리비안베이'는 한두 달 전 예약해야 성수기에 이용할 수 있다. 도심에서 머물며 '스테이케이션'하는 호텔파 개도 많았다. 강남구 봉은사로에 있는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부티크호텔 '카푸치노'는 7월 말~8월 초 만실에 가까운 예약률을 보였다. 이 호텔의 반려견 동반객 대상 여름 패키지인 '바크룸 패키지'(세금 포함 18만5000원)에는 반려견을 위한 토마토 파스타 또는 북어 파스타를 주 메뉴로 한 룸서비스가 제공됐다. 패키지 외 바크룸만 별도 이용 시엔 파우치에 장난감 1개, 치석 제거제 2개, 강아지 옷이 담긴 '강아지 전용 어메니티'를 준다. 오은진 예약실장은 "이용객은 주로 20대 후반~30대 중반 여성 고객"이라며 "반려견 전용 히노키탕은 별도 요금(5만5000원)을 받는데도 이용률이 높다"고 전했다.
국내 특급호텔도 반려견 동반 가능한 룸과 서비스를 늘리는 추세다. 쉐라톤은 대표적인 '도그 프렌들리(Dog-friend ly)' 호텔 체인이다.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은 반려견과 함께 숙박이 가능한 룸을 마련했다. 발코니가 있는 룸이라 쾌적하다. '러브 댓 도그' 패키지 예약 시 반려견을 위한 침대, 물&사료 전용 그릇, 매트, 배변 봉투를 제공한다. 이달 초 부산 해운대에는 국내 최초 애견 동반 전용 호텔 '더펫텔'이 등장했다. 건물 전체를 반려견 동반 고객을 위한 공간으로 꾸민 것이 특징. 호텔 안에 애견 미용실, 카페, 동물병원(오픈 예정)까지 갖췄다. 1박에 150만원인 펫 프레지던트 스위트룸도 있다. 이번 휴가 때 반려견 동반 가능 호텔을 이용했다는 이규리(33)씨는 "애견인들은 여행지 선택의 폭이 좁은데, 반려견 '세미'와 함께 호텔에서 주변 눈치 안 보며 편히 지냈다"고 했다.
애견 블로그(blog.naver.com/sks 5058)로 유명한 '봉쥬르봉스와'의 견주 소규성·김가연씨 부부는 태국 푸껫으로 떠난 이번 바캉스에 비숑프리제 봉모녀를 동반했다. "챙길 것도 많고 여러모로 '주개전도'된 폭소만발 여행이었지만 모든 걸 함께해야 진짜 가족이고 진짜 '반려'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식 키우듯 반려견도 예절 교육
끔찍이도 예쁜 반려견이지만 그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중계동 사는 이현숙(48)씨는 개를 극심히 싫어하는 '개 혐오자'였다. 개를 안고 다니는 사람만 봐도 뒤돌아서 혀를 차던 이씨가 작년 요크셔테리어 '호두'와 1년간 동거했던 일은 잊을 수 없다. "아들, 딸이 사춘기가 되니 집이 삭막해졌어요. 마음이 헛헛하던 차에 누가 개를 키워보라고 권해서 호두를 입양했는데 성격이 밝고 애교가 많아서 금세 마음이 열렸어요. 공통의 화제가 생기니 가족들이 다시 거실에 모여 예전처럼 사이가 좋아졌죠."
'허니문'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두의 짖는 소리에 급기야 경고문에 가까운 공고문이 아파트 게시판에 붙었다. 이씨는 주민들 눈치를 보며 호두를 숨겨 키우듯 하다 올 초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입양 보냈다.
전문가들은 "반려동물의 수는 늘었다지만 반려동물을 삶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문화적 환경은 조성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보신 문화가 뿌리 깊게 박힌 우리나라 정서상 반려견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과 극이다. 반려동물과의 공생을 위해서는 애견인들이 페티켓(Pet+Etiquette)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김광식 위드펫동물병원 원장은 "영국 등 선진국의 경우 부모 교육처럼 애견인을 대상으로 반려견 교육을 진행하며 반려견에게도 예절 교육을 시키는 게 일반적"이라며 "반려견을 자식 키우듯 엄격히 해야 타인과 어울려 잘 커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