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정부가 배포한 '간첩 식별 요령' 중 '심야에 라디오를 몰래 청취하는 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때 간첩들은 자정 직후 30분 정도 평양방송을 들으며 지령을 받았다. '34536, 18495, 93847…' 등 뜻 모를 숫자를 나열하는 방송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를 해독할 때 없어선 안 되는 것이 북으로부터 받은 난수표(亂數表)였다. 난수표라는 게 간첩 전용으로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1960~1970년대 한국에서 난수표는 간첩의 상징물 같았다. 간첩 검거를 알리는 당국의 발표장엔 권총, 무전기와 나란히 난수표가 꼭 전시됐다. 간첩에게 이 종이 쪼가리는 무기 못지않게 신경 써서 간직해야 할 소지품이었다. 북한 간첩은 이를 알약 병에 숨기기도 했고, 공동묘지 비석 밑 땅속에 보관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95년 10월 26일 자). 잘못해서 이걸 들켰다간 정체가 발각 나는 등 대참사가 닥칠 수 있다. 난수표를 잃어버려 공안 당국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비밀 지령이 모조리 해독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1996년 9월 강릉에 침투한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이 탈출 직전 제일 먼저 불태운 것도 난수표였다. 실화를 토대로 제작한 1980년대 드라마 '113수사본부'에서는 난수표를 잘못 관리해 위기에 빠지는 남파 공작원 이야기가 보인다. 드라마에서 어떤 간첩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병원 측이 옷 주머니 속에서 난수표를 발견하고 신고하는 바람에 꼬리가 밟힌다. 어느 고정간첩이 잃어버린 난수표를 찾으려다 뜻밖의 사태 속으로 빠지는 스토리도 있었다.
난수표가 발각될 때의 위험 부담을 없애려고 공작원이 난수표 대신 특정 단행본을 쓰기도 했다. 1980년 일본에서 붙잡힌 북한 간첩들은 일본 소설가 이시카와 다쓰조(石川達三)의 '금환식(金環蝕)'을 썼고, 2006년 국내에서 검거된 공안 사범은 톨스토이의 '부활'을 썼다. 가령 '12713'이라고 방송하면 소설책의 127페이지 13째줄 첫 글자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정해놓고 교신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사용된 작품 이름이 탄로 나는 순간, 모든 암호 지령이 풀릴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이 있다. 난수표를 간첩만 썼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배정 때의 은행알 추첨 방식을 버리고 1969년 컴퓨터 추첨을 도입할 때도 난수표를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감독의 사인 전달 때도 썼다. 상대팀의 '사인 훔치기'가 종종 일어나자 첩보전 수준의 난수표를 도입하는 게 한때 유행했다.
종잇장에 빼곡하게 숫자를 적어 놓은 난수표는 21세기 디지털 시대 개막과 함께 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에 역할을 물려주고 자취를 감췄다. 남파 공작원에게 하달하는 북한의 라디오 방송도 2000년 중단했다.
그랬던 북한이 최근 고전적 난수 방송을 16년 만에 다시 시작해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15일 0시 45분부터 12분간 평양방송은 "27호 탐사 대원을 위한 원격 교육대학 수학 복습 과제를 알려 드리겠다"며 암호 같은 숫자를 방송했다. 디지털 시대에 난수 방송이라니 좀 뜬금없다. 장기간 은둔 중인 고정간첩들을 깨우려는 메시지일 수도 있고, 불안감을 고조시키려는 심리전일 수도 있다는 등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지금 철 지난 난수표를 꺼내 들 정도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대남 공작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려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