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일본 독립'을 실현하려면 '민족의 혼이 표현된 헌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미군 점령을 경험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가 1950년대 초 자민당 창당을 준비하며 한 말이다. 연합국최고사령부(GHQ)가 패전국 일본에 '전쟁과 군대 보유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평화헌법을 강요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60여년 뒤 그의 외손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총리 관저 주인이 됐다. 아베 총리는 "일본 헌법은 일본이 점령당한 시대에 제정됐다"며 "21세기에 맞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10일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가 종료된 후 도쿄의 한 개표소에서 개표 작업이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NHK 등은 “자민당 등 개헌(改憲) 찬성 세력이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지난 2006년 1차 집권 땐 그 목표를 못 이루고 1년 만에 물러났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수 있다고 NHK 등 일본 언론이 전했다. 참의원 선거 개표가 진행 중인 11일 오전 0시30분 현재, 아베 총리가 이끄는 개헌 세력은 참의원 전체 의석 242석 중 최소 156석 이상에서 당선이 확정됐다. 최종 개표를 마칠 때까지, 아직 당선이 확정되지 않은 의석 7석 중에서 추가 당선자가 나오고, 여기에 개헌을 찬성하는 무소속 의원들까지 끌어들이면 '3분의 2'를 넘어선다. 중의원(하원)에선 이미 개헌세력이 전체 의석 72%를 차지하고 있다.

아베 총리, 개헌 7부 능선까지 올라

일본은 1947년 헌법을 만든 뒤 한 번도 개헌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건이 까다로웠다. 일본에서 개헌을 하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중의원(하원) 100명, 참의원(상원) 50명 이상이 동의해야 개헌안을 국회에 올릴 수 있다. 둘째, 양원에서 각각 재적 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이렇게 올라온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셋째로는 18세 이상 국민 과반이 찬성해야 개헌이 이뤄진다.

이날 선거를 통해 개헌 세력은 둘째 조건까지 만족하게 됐다. 역대 그 어느 선거 때보다 목표에 가깝게 다가선 것으로, '7부 능선까지 올라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선거 전까지 야당인 민진당과 공산당은 참의원 242석 중 71석을 점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거치며 의석수가 60석 전후로 쪼그라들 위기에 처했다. 민진당과 공산당은 유세 기간 중 "개헌 세력이 3분의 2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겨달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했지만,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진당 대표는 이날 밤 NHK 카메라 앞에서 무거운 얼굴로 "제가 대표니까, 책임이 있다"고 했다.

만만찮은 개헌 반대 여론이 부담

아베 총리는 올해 3월 "임기 중 개헌을 완수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꼭 쉽진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아베 총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교전권·군대 보유'를 포기한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하는 데 있지만, 일본 국민 사이에선 "평화헌법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 55%다(아사히신문 5월 조사).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국민의 반대가 강하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섣불리 9조를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면 반(反)아베 세력이 한데 뭉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면서 "우선 '환경권 신설' 같은 이야기로 개헌 논의의 문을 연 뒤, 차차 핵심인 9조 얘기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경우, 조항 하나하나가 논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과연 '아베 총리 임기 중에 개헌 작업을 마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아베 총리의 임기는 2018년 9월까지로 2년여가 남았는데, 개헌을 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 내에서는 '총재 자리를 2번 이상 연임할 수 없다'는 당규를 고쳐 아베 총리가 더 오래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