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왜군을 물리친 전쟁은?' 이 문제가 대입을 앞둔 학생들에게 출제됐다. 지난 1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 평가에서다. 수험생들 사이에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다"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반응이 나왔다. 일각에선 한국사 시험이 너무 쉬워져서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사는 2013년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돼 당시 중3이던 학생들이 수능을 치르는 올해부터 적용키로 했다. 청소년들이 6·25 전쟁 원인을 제대로 모르는 등 역사 지식이 부족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교육부는 그간 한국사 문제를 어렵게 출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쉬운 한국사 문제들은 배점이 큰 3점짜리(문제당 배점은 2점 또는 3점) 문항들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고종이 즉위한 후 실권자가 되어 개혁을 추진한 인물'을 고르는 3점짜리 문제의 보기들은 ①태조 ②광해군 ③흥선대원군 ④영조 ⑤광종이었다.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부패'와 '3·15 부정선거'가 촉발한 사건을 묻는 문제의 보기도 ①4·19혁명 ②6월 민주항쟁 ③물산장려운동 ④5·18민주화운동 ⑤민립대학 설립운동으로 제시됐다.
역사 지식이 없어도 답을 유추할 수 있는 문제도 있다.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우즈베키스탄)'와 '외국인을 닮은 원성왕릉 무인상(경주)' 그림을 제시하고 이 자료를 수집한 탐구 활동 보고서 주제를 맞히는 문제의 정답은 '고대 국가와 서역의 교류'였다.
수능 한국사가 쉬워진 경향은 지난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도 확인됐다. 전체 응시자 46만8531명 중 1등급이 4만9613명으로 10.6%나 됐다. 이번 6월 모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쉬웠다는 반응이 많아 1등급 비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국사는 절대평가다. 50점 만점 중 40점 이상이면 1등급을 받을 수 있어 20문제 중 배점별로 3~5개를 틀려도 1등급이다. 대학들은 이렇게 쉬운 한국사 점수에 또 후한 평가를 한다. 서울대는 환산 점수에서 한국사 3등급까지 만점을, 연세대·고려대는 인문계열은 3등급, 자연계열은 4등급까지 만점을 준다. 4등급 밑이어도 1~2점만 깎는 대학이 대부분이다.
수험생들은 모의 평가 이후 "한국사 걱정을 덜었다"는 분위기다. 수능 수험생 커뮤니티에는 '한국사 인터넷 강의 이제 그만 들어도 되겠다' '25점만 넘으면 4등급인데 이것도 못 맞으면 한국인이길 포기해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수험생 최성열(18)군은 "수능에서 문제가 갑자기 어려워질까 봐 걱정되기도 하지만 6월 모의고사 수준이라면 쉽게 1등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쯤 되자 한국사 수능 필수의 취지가 훼손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초등학생용 역사 만화책 한 번 보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며 "한국사 시험문제가 어려웠을 때 열심히 공부하던 상위권 학생들도 더 이상 한국사 공부를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두형 우리역사교육연구회장(서울 양정고 교사)은 "수능 필수가 된 후 학생들의 전반적인 한국사 수업 태도가 좋아진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역사 공부의 목적은 단편적인 지식 습득이 아니라 역사의 인과관계와 현재와의 의미를 배우는 건데 모의 평가 문제들은 그저 점수를 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고 했다.
모의 평가 수준이 적정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영덕 대성학력개발연구소장은 "얼마 전 한 아이돌 연예인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 곤욕을 치렀던 것처럼 기본적인 역사 지식을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며 "역사 상식을 쌓자는 게 수능 정책 취지였던 만큼 지금 같은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본다"고 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중요한 내용을 평이한 수준으로 출제하는 게 평가원의 방침"이라며 "한국인이 가져야 할 기본 한국사 상식을 평가한다는 취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