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74)가 3일(현지시각)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최근 호흡기 질환으로 입원한 알리는 병세가 나빠져 생명보조 장치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날 병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복싱 헤비급 챔피언을 세 차례 거머쥐면서 복싱계 전설이 된 알리는 지난 1981년 은퇴했고, 3년 뒤 파킨슨씨병 진단을 받아 30년 넘게 투병해왔다. 2014년 말에는 폐렴, 작년 1월에는 요로감염으로 입원치료를 받았고, 최근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알리는 1942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아마추어로 복싱을 시작해 18세에 이미 180승을 거두며 유명세를 얻었다. 국가대표로 뽑힌 그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영광을 오래가지 않았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도 햄버거집에서 쫓겨나는 등 백인의 멸시를 받은 알리는 오하이오강(江)에 메달을 던져 버리고 프로로 전향했다. 그는 훗날 “로마올림픽에서 가졌던 ‘내가 미국을 대표한다’는 환상이 깨졌다”고 말했다.
알리는 1964년 2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WBA·WBC 통합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꺾고 처음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알리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고 했다. 당시 ‘무적’으로 불리던 리스턴을 제압한 알리는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 복싱계를 휘어잡았다.
그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이다. 인종 차별에 저항한 알리는 노예에게 부여한 성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로 챔피언이 되고 나서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로 바꿨다. 미국의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말콤 엑스의 영향이었다. 이후에는 이슬람교 운동조직 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에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때 징집영장이 나오자 “베트콩은 나를 흑인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내가 왜 그들과 싸워야 하느냐”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그 대가로 그는 3년간 선수 자격이 정지되고 챔피언 자격을 빼앗겼다.
알리는 프로에서 세 차례에 걸쳐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74년 10월 아프리카 콩고에서 조지 포먼과 맞붙은 ‘정글에서의 혈투’는 복싱 역사에서 최고의 경기로 손꼽힌다. 당시 26세의 포먼은 강력한 인파이터 스타일의 WBA·WBC 통합챔피언이었고, 알리는 징집거부에 따른 공백으로 전성기가 지났다고 평가받는 32세의 아웃복서였다.
알리는 열세일 것이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고, 포먼을 8회 KO로 물리치고 다시 챔피언 벨트를 획득했다. 이 경기 후 알리는 미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알리를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알리는 1978년 레온 스핑크스에게 판정패해 타이틀을 잃었지만, 그해 재대결에서 승리해 3번째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다. 1980년 래리 홈즈에게 지면서 다시 타이틀을 잃었고, 1981년 11월 12일 트레버 버빅에 패배한 것을 끝으로 링을 떠났다. 알리의 프로 복싱 통산 전적은 56승(37KO) 5패.
최고의 경기력과 강인한 신념을 가진 알리는 은퇴 후 ‘최고의 챔피언’으로 추앙됐다. 1987년 권투잡지 ‘링매거진’은 알리를 ‘영원한 헤비급 1위 선수’로 선정했고,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알리는 파킨슨병 투병 중인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개막식에 성화 최종 점화자로 등장해 전 세계인들을 감동을 안겼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젊은 시절 인종차별에 저항해 올림픽 메달을 강에 던져버린 알리를 배려해 이례적으로 다시 금메달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