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9월 12일 아시아나항공 기장 A씨는 당일 비행이 예정돼 있던 김포~제주 간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A씨가 턱수염을 3㎝가량 기른 것을 회사의 한 임원이 본 뒤 갑자기 조종 업무에서 배제됐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 용모 규정엔 "수염을 길러선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는 총 29일 동안 조종석에 앉지 못했고 수염을 깎은 뒤에야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부당한 징계라며 구제 절차를 밟았지만,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26일 "정당한 업무 명령"이라며 회사 손을 들어줬다.
대한민국 직장에서 남자의 수염은 여전히 수난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사·공기업은 물론 공무원 사회에서도 수염은 보통 단정치 못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대개 "수염을 금지하는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고 하지만 남자 회사원들은 "머리 염색이나 장발도 눈치를 주는데 수염은 언감생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기업들은 보통 내부 규정에 '단정한 용모와 복장'을 사원의 의무로 두고 있다. 복장에 대해선 '단색 정장에 넥타이' '딱 달라붙는 바지는 불가' 식으로 자세히 규정하는 곳이 많지만, 용모 중 수염에 대해 따로 규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남자 사원 대다수는 공연히 튀는 걸 싫어해서 수염을 기르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객·호텔업 등 서비스업계에서 수염은 특히 금기시된다. 한 외국계 호텔기업 관계자는 "코 밑에 흉터가 있어 체모로 가리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경우 등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수염을 말끔히 깎는 것이 고객 응대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수염을 어색해하는 한국 문화에 대한 배려로 원래 수염을 기르던 외국인 호텔 임원도 한국에 부임하면 수염을 깎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의 경우 수염에 대한 금지 규정은 없다. 대통령령인 '국가공무원 복무 규정'엔 '단정한 복장을 하여야 한다'는 조항만 있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일반 국민에게 불쾌감을 주는 수준만 아니라면 수염을 기르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문화체육관광부 등 일부 부처엔 수염을 기르는 직원들이 있다. 지난 2007년엔 경찰관이 콧수염을 기른 것이 징계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공무원은 대세를 따라 코 밑과 턱을 말끔하게 면도한다. 한 30대 외교부 직원은 "콤비 재킷만 입고 출근해도 '○○씨, 멋쟁이네?'라는 반응 때문에 은근히 신경 쓰이는데 수염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군대에선 위생상의 이유로 수염을 금지하고 있다.
핍박받는 수염의 '해방구'는 서비스 직종을 제외한 외국계 기업이나 엔터테인먼트·디자인 업계다. 한 미국계 IT업체의 4년 차 직원은 "본부장급 간부 중에도 수염을 기르는 경우가 있어 회사 규정 때문에 수염을 못 기른다는 압박감은 없다"고 말했다. 연예인을 비롯해 방송사 PD·스태프 중에도 수염으로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한 호텔 이용사(理容師) 김성철(45)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영업자나 예술·디자인 쪽에서 일하는 손님들이 전문적인 수염 관리를 받으러 많이 온다"고 말했다.
문화·복식 사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긴 수염은 1895년 단발령 이후 유교적 잔재로 치부돼 대부분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양식 카이저 수염(양쪽 끝이 올라간 콧수염)이 유행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군사 정권에 의한 산업화 과정에서 수염은 봉건 문화의 유물로 인식돼 공식석상에서 점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일권 교수(민속학 전공)는 "단정한 수염은 삼국시대 벽화에서부터 확인되는 우리의 전통 관습"이라며 "수염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 인상을 갖고 제재하는 건 개성을 존중하는 근대정신과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