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 발의 건수, 가결률=의원 입법 성적…단순 정비, 법안 '베끼기' 질 낮은 법안 남발
법안 발의 시점부터 전반적인 영향 평가할 수 있는 '입법 영향평가제도 도입' 검토해야

"열 몇 개 법안을 모두 위원장께서...차제에는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A 의원)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 보좌관들이 너무 부지런해서…."(B 소위원장)

19대 국회인 지난 2013년 12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위원장인 B의원은 17건의 법정형 정비 법안을 대표발의로 소위 심사에 올렸다. 법률 제∙개정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한 법률들의 경우 벌금액 수준이 현재의 경제 수준을 반영하지 못해 형평성을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정형 정비 법안은 국회 내에서는 암암리에 ‘실적 쌓기용’ 법안으로 분류된다. 기술적으로 단순한 수치만 바꾸는 법안이기에 통과 가능성이 높아 개인 의원들의 법안 가결 ‘성적’을 높이는 데 용이해서다. 따라서 일부 상임위에서는 위원장이 법정형 정비 법안을 위원들에게 건수로 배분하는 ‘관행’도 이뤄진다.

전문가들은 20대국회에서는 가결률이라는 양으로 입법 성적을 평가하기 보다는 제대로 된 법안을 발의했는지 ‘질’로 평가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 건수 채우기 법안들…법안 통과 ‘양’ 보다는 ‘질’로 검증해야

지난달 29일로 종료한 19대 국회는 법안 처리 가결률이 총 1만7822건 중 7429건(대안 반영 폐기 포함)이 처리되면서 42%를 기록했다. 17대 국회(56.8%), 18대 국회(53.5%)와 비교하면 낮은 수치다. 반면 19대 국회 발의 건수는 17대(7489건), 18대(1만3913건)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렇다면 법안 가결률이 높으면 입법 성과가 좋은 국회일까.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회의 입법 성적을 평가할 때 법안 가결률이라는 ‘양’ 보다는 ‘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안 가결률로 국회와 의원들의 입법 성적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가결률 안에는 ‘실적 채우기용’ 법안들이 다수 포함되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법안 가결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용어 변경 등 단순 개정 입법과 대안 반영을 노린 ‘베끼기 법안’ 등이다.

용어 변경 등 단순 개정 입법은 19대 국회에서 유난히 많이 사용됐다. 지난 2013년 7월부터 시행된 민법 개정은 폐지된 금치산자, 한정치산자라는 용어 대신 피성년후견인, 피한정후견인으로 법을 변경해야 하는 과제를 가져왔다. 금치산자, 한정치산자가 법안에 언급되는 경우 피성년후견인, 피한정후견인으로 단어만 단순 변경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양심층수의 개발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3조는 면허를 취득할 수 없는 사람으로 '금치산자 또는 한정치산자'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피성년후견인 또는 피한정후견인'으로 용어만 바꾸는 식이다.

그러자 의원들은 관련 법안을 본인의 이름으로 대표 발의하기 시작했다. 단어만 바꾸는 기술적인 개정 작업이기 때문에 가결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다른 법률안과 함께 ‘대안’으로 반영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적다. 오로지 본인의 법안 통과 실적으로 남길 수 있다. 법정형 정비 법안도 의원들이 선호하는 꼼수 입법이다. 형벌 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벌금형을 현실화하는 등 불합리한 형벌을 바로 잡는 작업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용어 변경 관련 법안은 19대 국회 내 약 255여건이 발의됐다. 법정형 정비 법안도 약 330여건이다. 이들 법안은 대부분 손쉽게 국회 문턱을 넘었다. 2013년 7월 민법 개정 시작 후 열린 2014년 2월 임시국회를 살펴보면 통과된 총 법안 158건 중 69건인 약 43%가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와 법정형 정비 법안이었다. 19대 국회에서 법안 가결률이 높았던 최규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경우 가결 법안 34건 중 23건이 모두 금치산자와 한정치산자 용어를 정비하는 법안이었다.

국회 의원실 관계자는 “정부가 금치산자, 한정치산자와 법정형 정비 법안을 리스트로 정리해 상임위원장실에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었다”며 “상임위원장이 법안들을 위원들에게 배분해 실적을 나눠 갖는 것은 공공연한 관행이었다”고 전했다.

국회 가결률에서는 대안 반영 폐기 법안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대안 반영 폐기는 법안명이 같거나, 법안명이 달라도 내용의 연관성이 있을 경우 별도의 대안 하나를 마련해 각각의 내용을 반영한 뒤 나머지 법안을 폐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임위에서 하나로 통합된 법안이 최종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19대 국회에서 대안반영 폐기 건수는 4636건으로 18대 국회 3227건보다 증가했다.

문제는 대안 반영 폐기도 국회의원 법안 가결률 실적에 포함되면서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부가 낸 법안을 비슷하게 베껴서 대안 반영을 노리는 방법이다. 중대 현안에 대한 법안은 통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내용만 비슷하게 법안을 여러 개 내는 경우도 있다.

◆ ‘법안 발의 많은 의원=일하는 국회’ 탈피…입법 영향평가제 도입하자

전문가들은 법안 발의부터 검증하는 ‘입법평가 제도’ 도입 필요성을 제안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안 가결률 뿐만 아니라 법안 발의 건수로 의원들의 입법 성적을 매기는 것에도 신중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 국회 회기가 열리면 한 상임위가 심의해야 할 법안은 평균 200~300건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 소위를 진행한다고 할 때 적어도 하루에 40~50여건의 법안의 통과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갖기 어려운 의원들이 여러 내용의 법안을 짧은 시간 동안 내실 있게 들여다 보기는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법안 발의 시점부터 입법 영향평가제도 또는 입법 영향분석제도를 도입해 사전에 질이 낮은 법안을 거르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홍완식 한국입법학회 고문은 “법안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담보하는 법안비용추계제도가 도입되는 등의 노력은 있어왔으나, 법률안의 전반적인 영향을 평가하는 입법 영향평가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며 “법률안 제출의 증가현상에 비추어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고 밝혔다.

한국입법학회 소속 오일석 박사는 “법률안이 발의될 때 입법 영향 분석이 보다 더 철저하게 실시돼야 하며, 기존에 발의된 법률안과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법률안의 발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입법 과정 상의 제도적 장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