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장일현 특파원

"영국 철강 산업이 (끊어지기 직전의) 한 줄기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다." (앤절라 이글 영국 하원 의원)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한때 세계 철강 생산의 40% 이상을 점유했던 영국의 철강 산업이 위기에 몰렸다. 지난달 말 인도 최대 철강 기업인 타타스틸이 지난 2007년 이후 영국에서 운영하던 철강 사업을 완전히 접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영국의 철강 산업 종사자는 모두 1만8000여명으로 이 중 1만5000여명이 타타스틸이 운영하는 공장·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다. 타타스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조만간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영국 공장들의 문을 모두 닫겠다"고 했다.

BBC는 "영국은 공급 과잉 등 세계 철강 업계가 당면하고 있는 공통 문제에다 영국만의 치명적 약점들이 중첩되면서 철강 산업 전체가 죽음에 내몰렸다"고 평가했다. 영국 정부는 "타타스틸 공장을 사겠다는 기업과 공동 투자도 할 수 있다"며 인수를 독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쪼그라드는 영국의 철강 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타타스틸은 영국에서 하루 100만파운드(약 16억3000만원)씩 적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자 행진은 상당 기간 전부터 진행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타타스틸 소식통을 인용, "타타스틸이 포트탤벗 제철소 등 주요 사업장을 18개월 전부터 팔려고 했지만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철강 산업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영국의 철강 생산량은 1086만t으로 1997년의 58.7% 수준에 불과했다.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7년 2.3%에서 지난해 0.7% 미만으로 떨어졌다.

영국 철강 업계는 감원(減員)으로 대응했다. 타타스틸은 지난해 7월 720명, 10월 1200명을 정리해고한 데 이어 올 초 직원 1050명을 추가로 줄이겠다고 했다. 레드카스틸과 카파로인더스트리는 파산 신청을 해 각각 직원 2200명과 1700명이 실직 위험에 처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국 철강 업계의 종사자는 5만명을 웃돌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2만명 이하로 떨어졌다. 영국 정부는 타타스틸이 공장 문을 닫으면 하도급업체와 관련 업체 등을 포함해 4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타타스틸의 일부 수익성 있는 사업장은 매각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타타스틸은 지난 11일 "영국 투자회사 그레이불(Greybull)에 잉글랜드 북동부에 있는 스컨소프 제철소를 팔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4300명의 직원이 일하는 포트탤벗 제철소 등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리버티 하우스 그룹이 포트탤벗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실제 인수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세계 철강 업계 심각한 공급 과잉

국제 철강 업계는 구조적인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 철강 수요는 지난해 1.7% 감소한 데 이어 올해도 0.8% 줄어든 14억8700만t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세계철강협회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올해 철강 수요가 0.7%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중국 등 세계 주요국 경제가 위축된 상황이 계속되면서 수요 전망을 낮춰 잡았다.

이에 비해 공급량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 상황이다. 전 세계 철강 업계 평균 가동률은 64.6%(작년 말 현재)로 떨어졌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현재 전 세계 철강 생산 능력이 수요에 비해 6억t가량 과잉인 것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각국의 철강 회사들이 공장을 다 돌리지 않는데도 세계 시장에선 철강이 남아도는 실정인 것이다.

지난 1일(현지 시각) 영국 남부 웨일스 포트탤벗에서 타타스틸 근로자들이“우리의 철강을 살려달라(Save Our Steel·S0S)”고 적은 피켓을 들고 현장을 방문하는 사지드 자비드 영국 기업혁신기술부 장관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인도 타타스틸은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최근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과 덤핑 판매는 국제 철강 시세의 폭락을 주도했다. 영국이 2014년 유럽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철강의 평균 가격은 t당 897유로였지만, 중국산은 583유로에 불과했다. 영국 철강 업계 관계자는 "중국 철강 제품의 가격 수준은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고 말했다. 유럽 전역에선 2008년 이후 철강 업계에서 7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각국은 세계경제가 갑자기 호황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 철강 생산량 축소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향후 5년 동안 철강 생산 능력을 연간 1억~1억5000만t 줄일 방침이다. 중국 업체도 과잉 생산과 가격 하락으로 손해를 보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해 약 8억t의 철강을 생산, 전 세계 생산량의 50% 정도를 차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정부가 자국 철강 업계의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업계의 반발이 거셀 것이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르셀로미탈·신일철주금 등 유럽과 일본 제철소들도 일부 고로(高爐)의 가동을 중단하는 등 공급량 조절에 나서고 있다.

◇"전기료 유럽 최고, 정부는 기업 방치"… 영국 내부 문제도 심각

세계 철강 생산국 가운데 유독 영국의 철강 업계는 심하게 충격을 받고 있다.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에너지 가격이 비싸다. 지난해 영국 철강 회사는 1시간에 1㎾의 전기를 쓸 때마다 9.54펜스를 냈는데, 이는 다른 유럽 주요 13개국 평균 5.53펜스의 1.7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스웨덴은 2.77펜스에 불과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7.45펜스, 4.38펜스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영국 파운드화의 강세로 수출 상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되는 약점도 있었다.

영국 정부는 기업의 열악한 경영 환경을 방치하는 등 때늦은 대응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타타스틸이 영국 사업 철수를 발표한 날, 사지드 자비드 기업혁신기술부 장관은 출장 겸 휴가 일정으로 호주에 가 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중국산 저가 덤핑에 대해서도 다른 EU 국가들은 각종 보조금 등을 통해 기업들을 보호했지만, 영국은 자유방임주의 정책 시행으로 기업들을 방치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현 정부의 무관심·무능력으로 영국 철강 산업이 위험에 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