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무늬 셔츠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 위에 모자 달린 후드 재킷이나 후줄근한 재킷을 입는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걸친 데다 신발은 보통 운동화다. 학창 시절 '찌질이'나 '괴짜' 취급을 받던 이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이다. 최근 이런 패션이 '너드 룩'(nerd look)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구찌와 막스마라의 패션쇼에는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모델들이 올라왔고, 패션 잡지들은 '응답하라 1988'에서 모범생 역할을 맡은 '성보라'(류혜영)의 패션을 분석한다.
'너드룩'은 한두 가지 아이템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 일단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안경이 필수품이다. 수퍼 히어로 캐릭터 티셔츠에 후드 재킷을 입거나 체크 셔츠에 조끼, 스웨터를 걸치고 면바지를 맞춰 입는 경우가 많다. 조끼와 스웨터는 마름모 무늬(아가일) 패턴이고, 재킷이나 바지는 코듀로이(코르덴이라 불리는 골이 지게 짠 직물) 소재다. 아버지나 할머니 옷을 빌려 입은 듯 낡아 보이고 색상 조합이나 사이즈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부자연스럽고 답답하게 보이는 것이 이 패션의 특징이다.
사전은 '너드'를 '바보, 멍청이'로 풀이하지만 이들은 지적·기술적으로 어느 한 가지에 좁고 깊게 빠진 사람이다. '오타쿠'가 여기에 가장 가깝다. IT 업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SF, 판타지를 광적으로 좋아하기도 한다. 너드와 오타쿠가 바보나 괴짜처럼 보이는 이유는 자신이 빠져 있는 일 외 다른 것에는 관심도 없고, 서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생활이나 이성 관계에서 그렇다. 당연히 학교나 직장에서 인기가 있는 부류는 아니다. 좋게는 '범생', 나쁘게는 '찌질이'로 불렸다. 놀림과 비웃음을 받았던 이들의 패션은 어떻게 유행의 최전선이 됐을까?
21세기, IT가 사회 변화의 중심이 되면서 너드와 오타쿠가 스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의 대표적인 패션이었던 검정 터틀넥과 청바지는 '놈코어'(normcore·'노멀'과 '하드코어'의 합성어로 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 트렌드를 몰고왔고, 그가 신었던 '뉴발란스' 운동화는 품절이 될 정도로 유행이었다. 10년 전 같았으면 록스타나 부동산 재벌과 데이트를 했을 톱모델 미란다 커가 모바일 메신저 기업 스냅챗 창업자인 에반 슈피겔과 사귄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월 '어떤 이들에게 마크 저커버그는 라이프 스타일의 구루(guru·영적 지도자)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저커버그는 더 이상 IT의 성공이나 어마어마한 부를 상징하는 게 아니다"며 "중국어를 배우고, 북클럽을 꾸리며 자선 활동을 하면서 저커버그는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 됐다"고 했다. 너드와 오타쿠가 단지 창업자나 개발자가 아니라 시대의 유행을 이끌어가는 개척자가 된 것이다.
패션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이런 변화가 시작됐다. 너드들의 전유물로 꼽히던 수퍼 히어로 만화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이들의 문화가 대중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캘리포니아 공대(칼텍) 공학도 네 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트콤 '빅뱅이론'이나 스타트업에 뛰어든 공대 출신들을 생생하고 코믹하게 그려낸 드라마 '실리콘 밸리'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도 MBC의 '능력자들'처럼 한 가지 분야에 깊이 빠진 이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열차 바퀴만 보고도 열차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철도 능력자'와 "버스 박물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는 '버스 능력자'가 등장한다. 지난달 출간된 책 '덕질로 인생역전'은 자신이 몰두한 분야를 직업으로 성공시킨 국내 오타쿠들을 다루고 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에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나 록콘서트를 보듯 열광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만 매진한 이세돌과 구글을 창업한 세르게이 브린, 10대에 이미 컴퓨터 게임을 개발한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허사비스가 함께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서 있는 모습은 이 시대 너드와 오타쿠들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이제 세상을 바꾸는 건 놀림과 비웃음을 받았던 '찌질이'와 '괴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