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에 사는 이모(19)군은 3월 초 고3이 되면서 국·영·수 등 주요 과목과 과학탐구 선택과목인 화학, 생명과학 등 교과서 10여권을 새로 샀다. 이군이 17만원을 들여 장만한 교과서는 2주 만에 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재활용 쓰레기'가 됐다. 학교에서 교과서 대신 'EBS 수능특강 시리즈'를 교재로 삼아 수업한다고 공지했기 때문이다. 이군은 학교 방침에 따라 총 11권의 EBS 교재를 장만하느라 7만원을 넘게 썼다. 그는 "학기 중에 EBS 수능완성 교재가 나오면 추가로 사야 한다"면서 "EBS 교재로 수업할 거면, 보지도 않을 교과서를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학수능시험에 EBS 교재 연계율이 70%에 달하면서 일선 학교에서 교과서가 사라지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교과서 대신 EBS 교재 내용과 문제풀이로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 수능 준비라는 명목 때문에 공교육 현장에서 교과서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공교육 정상화를 돕기 위한 EBS 교재와 정부의 수능 연계 정책이 오히려 공교육의 발목을 잡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초·중등교육법에 따르면, 정규 수업시간에는 국가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거나 교육부장관이 검정 혹은 인정한 교과용 도서를 사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EBS 교재는 '참고서'가 될 수 있지만, 교과서를 대신하는 교재로 활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일선 교사는 물론 교육 당국도 이런 실상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익명을 요구한 교육부의 한 장학관은 "일부 학교에서 EBS 교재를 교과서처럼 사용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동작구의 한 사립고 교사는 "교육청에서 교과서로 수업하라고 권장하지만, 학생과 학부모가 (수능을 대비해) EBS 교재로 수업하는 것을 선호한다"며 "결과적으로 학교 수업보다 EBS 교재 문제풀이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서울이든 지방이든 EBS 교재가 교과서를 대체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올해 수능은 EBS '수능특강'과 '수능완성' 교재 내용과 문제가 상당수 출제될 예정이다. 고3 학생들은 수능 대비를 위해 한국사 1권, 국어 4권(특강 3권·완성 1권), 영어 4권(특강 3권·완성 1권), 수학 가형 4권(특강 3권·완성 1권), 수학 나형 3권(특강 2권·완성 1권) 등을 봐야 한다. 이 중 9권은 문과·이과에 상관없이 풀어야 하며, 수학이나 사회탐구·과학탐구 선택과목에 따라 봐야 할 EBS 교재의 수는 7~8권 더 추가된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EBS 교재를 사는 비용만 10여만원이 더 들어가는 셈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새로 산 교과서를 받자마자 EBS 교재를 다시 사야 하는 '중복 지출'이 불만이다. 고3 딸을 둔 한 주부는 "애가 공부하는 데 볼 책을 사는 건 아깝지 않지만, 한 번도 보지도 않을 교과서를 사는 건 낭비 아니냐"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입시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하는 유모(41)씨는 "특정 교재에서 수능시험이 다수 출제되는 경향이 바뀌지 않는 한 교과서는 계속 '찬밥 신세'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당국은 전국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교과서가 철저히 외면받는 상황을 알면서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순미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는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무조항이지만 고3 수업의 경우 수능 시험이라는 대입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며 "각 지자체 교육청끼리 문제점을 공유하고, 학기마다 교과서 사용 여부를 점검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천 EBS 학교교육기획부장은 "EBS도 교육 정책에 맞춰 학교 수업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EBS 연계율이 확정된 상태라 해결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EBS의 설립 목적인 공교육 보완 의무를 지키려면 근본적으로 교육 제도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EBS 수능 연계 정책은 오는 2021학년도 수능에서야 바뀔 것으로 보인다. 2021학년도 수능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적용하는 첫 시험으로 교육부는 내년까지 수능 개편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입력 2016.03.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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