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죄송합니다…."

작년 11월 여자 럭비 대표팀의 용환명(44) 감독은 또다시 한 선수로부터 그만둔다는 통보를 받았다. 2014년 그가 사령탑을 맡은 이후 2년간 운동을 포기한 선수가 10명을 넘었다.

하지만 용 감독은 "남아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열악한 현실 탓이다. 여자 럭비는 실업팀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클럽팀도 2개(수원여대, 서울 엘리스)뿐이어서 미래가 불투명하다. 하루에 6만원, 한 달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국가대표 훈련수당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프로팀 하나 없는 한국 여자 럭비가 국제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는 ‘작은 기적’을 만들었다. 사진은 지난 20일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공격하는 모습. 인도네시아 선수들은 히잡을 쓰고 경기에 나섰다.

한국 대표팀의 자격은 '신체 건강한 여성'이면 된다. 그럼에도 7인제 럭비 국제대회 엔트리(12명)도 채우지 못한다. 현재 대표팀의 인원은 9명뿐이며, 그나마 경력이 2년이 넘는 선수는 고작 3명이다.

올해 리우올림픽에서 럭비가 92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부활되지만 한국 여자는 나가지 못한다. 작년 3월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대회를 겸한 '2015 아시아 럭비 발전대회'에서 6개 팀 중 최종 5위에 머물며 탈락한 탓이다. 이 대회에서 우승해야 아시아 최종 예선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흐른 지난 21일 여자 럭비는 '작은 기적'을 이룩했다. 올림픽 좌절을 맛본 바로 그 대회인 2016 아시아 럭비 발전대회(인도 첸나이)에서 정상에 올랐다. 여자 럭비가 2010년 처음 대표팀을 꾸린 후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극적인 우승을 일군 선수들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5개국이 참가한 대회에서 한국은 예선 3승1패로 결승에 올라 괌을 24대19로 물리쳤다. 연장 끝에 마지막 트라이를 성공시켜 승리를 완성했다.

우승 멤버를 보면 '외인구단'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해머던지기(임재원), 육상 단거리(이주연), 복싱(장혜수), 합기도(김동리), 태권도(장혜린) 등 다른 운동을 하다 럭비에 입문한 선수도 있고 평범한 체육대학 출신도 있다. "너무 낯선 종목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문턱이 낮아 태극 마크의 꿈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등 각자의 계기는 다양하다. 선수 전원이 미혼 20대 여성이라는 것이 유일한 공통점이다. 이들은 고된 훈련을 통해 '진짜 선수'로 거듭났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게 변했고 멍이 들지 않는 날이 드물었다. 타박상·찰과상은 '잔부상'이었다. 전용 훈련장이 없는 이들은 구장이 무료로 제공되는 기간에 맞춰 훈련하려고 강진·진도·울진·인천 등 전국 각지를 전전한다. 감독이 직접 스타렉스 운전대를 잡고 대표팀 '전국 투어'의 기사 역할을 한다. "여자가 무슨 럭비냐" "무늬만 대표팀 아니냐"는 주변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모든 악조건을 극복한 원동력은 오로지 정열이었다. 주장 김동리(24)는 "태클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트라이를 성공할 때 짜릿함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서보희(24)는 "럭비는 팀워크의 스포츠다. 의지할 수 있는 동료와 함께 운동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이번 대회를 두 달 앞두고 대표팀은 대한럭비협회 지원금으로 열흘간 홍콩 전지훈련을 떠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가본 해외 훈련이었다. 대표팀은 강한 홍콩 클럽과 연습하며 기량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대회 우승으로 사상 첫 아시아 1부 리그 승격이 유력해진 대표팀은 이제 2020 도쿄올림픽 무대를 향해 '기적의 트라이'를 준비하고 있다.

"더 이상 정든 동료를 잃지 않는 게 작은 소망입니다. 현실에 부딪혀 럭비를 포기하지 않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선수들에게 우승 소감을 묻자 가장 먼저 돌아온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