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주말이었다.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 고려인 3세인 소프라노 넬리 리 등 해외에서 전해 온 부음부터, 광복 후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김성집, 7선 의원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오장군의 발톱'의 극작가 박조열 등 국내에서 이어진 안타까운 소식까지. 우리의 삶과 예술을 풍성하게 이끌었던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1983년 장미를 든 에코 1980년에 쓴 ‘장미의 이름’으로 움베르토 에코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하지만 늘 “내 직업은 철학자. 소설은 주말에만 쓰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라고 농담하고는 했다. 사진은 장미를 손에 들고 1983년 미국 사진 잡지 라이프 표지에 등장했던 움베르토 에코.

유난히 많은 문화 예술인이 세상을 떠난 주말이지만, 전 세계 언론의 가장 많은 애도를 받은 인물은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84)였다. 기호학·철학·미학·중세 역사학의 권위자였으며, 영화·만화·드라마 등 대중문화 전반의 익살 넘치는 평론가이자, 1000만부 넘게 팔린 '장미의 이름'등 7권의 장편을 쓴 베스트셀러 소설가. '세상의 모든 지식'이라 불렸던 그가 지난 19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자택에서 숨졌다. 에코만큼 권위 있는 학자도 적지 않고, 그 이상 사랑받은 작가도 많지만, 학문·문학·대중문화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대중과 학계 양쪽의 지지를 받은 지성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2012년 7월 파리 생 슐피스 자택에서 만난 에코는 뜻밖에 소박한 인물이었다. 20세에 처음 찾은 파리가 너무 멋져서 이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꿨고, 40년 만인 환갑에야 꿈을 이뤄 마침내 집을 샀다고 했다. 에코의 밀라노 자택은 3만권의 장서로 가득 찬 '도서관'이지만 파리 자택은 평범했다. 여든에 아이패드와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노학자였지만, 그는 당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인터넷의 역설을 지적했다. "정보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지적 빈자(貧者)들에게는 종이책과 달리 여과장치 없는 인터넷의 폐해가 크다"면서 "인터넷 정보를 이용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반드시 정보를 여과하고 비교하는 분별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었다.

대중에게는 48세인 1980년에 쓴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익숙하지만, 그는 이미 20대 후반인 1960년대 초부터 중세 연구와 기호학으로 인정받은 학자였다. '장미의 이름'의 탄생은 어찌 보면 우연. 단편 추리소설 몇 편을 모아 책을 펴내려던 친구가 에코에게 감수를 부탁했고, 읽던 도중 느닷없이 독살당한 수도사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날부터 충동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두 달 만에 완성한 작품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소설가가 된 것은 필연. 에코는 이론으로는 불가능한 막다른 길에 이르면, 소설로 돌파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령 늙은 노파를 죽이면 윤리학에서는 F를 받지만, 소설로 쓰면 '죄와 벌'이라는 걸작이 태어난다는 것.

에코는 드라마·추리소설·만화 등 대중문화가 생산한 어떤 것도 문화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예외적 학자였다.

유머와 위트는 에코 삶을 이루는 핵심 요소였다. 진지하기로 이름난 문학전문지 '파리 리뷰'가 "성장소설은 어느 정도 감정교육과 성교육을 병행하는데, 당신이 쓴 모든 소설에 성적인 장면 묘사는 단 두 군데뿐"이라고 지적하자 "성에 대해 쓰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걸 좋아한다"고 답했고, "인기 작가가 됨으로써 진지한 사상가로서의 명성이 추락했다고 생각하나"는 냉소적 질문에는 "'장미의 이름' 출간 뒤 받은 전 세계 대학 명예박사학위만 40여 개"라고 익살스럽게 반박했다.

한 번도 방한한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넓고 깊었다. 열린책들이 밝힌 에코 책 40여 종의 국내 총판매 부수는 180만부이며, 이 중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장미의 이름'(73만부), 비소설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20만부)이다.

그의 별칭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 학문과 문학 두 바퀴를 동시에 굴리며,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정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파리에서의 인터뷰에서 에코는 모두에게 유용할 듯한 실천 원칙을 들려줬다. 바로'빈틈과 틈새의 활용'이다. 우리의 삶은 빈틈으로 가득 차 있고, 기자가 1층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5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던 잠깐의 '틈새'에도 사유 연습을 했다는 것.

가족들은 이날까지 공식적으로 에코의 사인을 밝힌 적이 없다. '100세 시대'가 일반 명사처럼 된 시대, 느닷없이 찾아온 그의 부음은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지식'에게 유일한 미답(未踏)이었던 죽음의 신비, 지구가 아니라 우주의 빈틈을 활용하기 위해 예고 없이 훌쩍 떠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