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덜 깼나. 라디오에서 익숙한 태진아 노래가 나오는데 가사가 이렇게 들린다. "사람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이제 아예 환청이 들리는구나 역시 술을 끊어야 해 다짐하는데 한번 '사랑'이 '사람'으로 들리고 나니 사랑 노래 가사가 죄다 그렇게 들어온다. 최진희 노래는 거의 시(詩) 아니면 철학이다.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람은 알 수 없어요. 사람으로 눈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은 꼭 이 말씀으로 수업을 열었다. "먼저 사람이 되어라." 세상이 다 짜증 나던 시절이다. 이미 사람인데 또 사람이 되라니 저 고루한 인식론적 회의주의(그때는 태연하게 썼는데 지금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반발심이 스프링처럼 튕겨 올랐다. "그러는 댁은 사람입니까?" 되물었고 그날 그 선생은 사람이 아니었다.
저 혼자 사람 되는 건 쉽다. 면벽 수행을 하든 새벽 기도를 다니든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죽자고 매진하면 '가끔' 된다. 나이 들고 보니 사람 된다는 건 저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사람 '노릇'을 한다는 말이었고 결국 자식 노릇, 부모 노릇이었다. 부모 노릇은 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다. 아이에게 누가 제일 좋냐 물어보면 아직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순이다. 가끔 이모부 다음으로 밀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어디 닮은 데는 없나 살펴본다.
결혼이 늦었고 아이들이 어리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건 아이들이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하는 시간이 길다는 의미다. 무조건 오래 버티고 볼 일이다. 부모 얼굴에 웃음 피게 하고 주름 짓지 않게 하는 게 자식 노릇이다. 신기하게도 인생 좀 풀리나 싶으면 부모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곁을 떠나버리신다. 몇 년 더 계시다가 가면 어디가 덧나나 참 성격들 이상하시다.
자식 노릇 못하는 게 피부에 와 닿는 게 명절 때다. 어쩌다 보니 들어가는 회사마다 힘든 회사였고 그 힘든 회사가 또 제일 어려울 때가 소생이 들어갔을 때였다. 어느 해인가 명절이 낀 달인데도 월급만 달랑 반이 나왔다. 빈손으로 집에 오는데 체한 듯 속이 답답했다. 전철 안 앞에 앉은 사람이 스팸 선물 세트를 무릎 사이에 아무렇게나 낀 채 졸고 있었다. 그 아무렇게나가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별로 필요하지 않으면 저 주시면 안 될까요" 소리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결국 동네 입구에서 선물 세트 두 개를 내 돈으로 샀다. "형편이 안 좋아서 이렇게밖에 못 준대요." 설마 참치 캔 같은 게 좋아서 그러셨을까. 부모님은 기특한지 그걸 몇 번이나 들어보며 중얼거리셨다. "제법 무겁네."
명절 기피하는 청춘들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마음이 짠해졌다. 학생들에게 왜 대기업 가려고 하느냐 물으면 답 중 반 이상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란다. 그러니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미안한 거다. 자기 힘든 것보다 부모 마음에 그늘지는 게 더 힘들고 죄송한 거다. 길고 복잡한 위로 필요 없다. 풀 죽은 청춘에게 "걱정 마, 인생 길어" 등짝 한 번 철썩 때려주시면 된다(좀 밉기도 하니까 그 마음까지 슬쩍 담아서). 위로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명절 정도는 넘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