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3살 청년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한 일명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된 아더 존 패터슨(37)에 대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19년 전 같은 사건의 피고인으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선고 받은 에드워드 리도 공범으로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심규홍)는 29일 패터슨에 대해 “에드워드 리(38)의 진술은 일관성이 있다. 반면 패터슨 진술은 객관적 증거나 신빙성이 없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번 선고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18년 9개월 만이다. 패터슨이 범행 당시 18세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20년형은 법원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무거운 형이다. 재판부는 리에 대해서는 패터슨을 부추겨 살인을 도왔다고 판단해 공범으로 인정했다.
이태원 살인 사건은 1997년 4월 3일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당시 23세)씨가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패터슨과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를 체포했다.
당시 검찰은 리만을 살인범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8년 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패터슨은 흉기소지·증거인멸 혐의로 복역하다 1998년 사면됐다. 이후, 검찰이 출국금지 기간을 연장하지 않은 사이 다음해 8월 미국으로 달아났다. 재수사에 나선 검찰은 리를 패터슨과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봤지만 이미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이 났기 때문에 다시 기소하지는 못하고 패터슨만 기소했다.
재판부는 “패터슨은 별다른 이유 없이 20대 남성을 햄버거 가게에서 살해했다. 피해자는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부모, 누나,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영문도 모르고 사망했다. 유족들은 이후 정신적 충격과 고통에 시달렸다”고 했다.
재판부는 “패터슨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고 1997년 4월 첫 진술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리에게 전가하는 등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패터슨은 이날 하늘색 수의(囚衣)를 입고 재판장에 목례하며 법정에 들어섰다. 그는 덤덤하게 재판장을 바라보며 선고를 들었다. 선고가 내려지자 크게 한숨을 쉬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 사건 직후 행방과 옷에 묻은 혈흔이 주요 판단 요소로
법원은 혈흔이 묻은 정도와 사건 직후 패터슨과 리의 행동이 상반된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소변기와 세면대 거울에 묻은 혈흔을 보면 가해자의 온몸과 오른손에는 피가 많이 묻었을 것이 명백하다. 리는 셔츠 부근에만 핏자국이 있었지만, 패터슨은 온몸에 피가 묻었다”고 했다.
재판부는 “사건 직후 패터슨은 옷, 손, 머리 신발에 피가 많이 묻어 윗층 가게 화장실에서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리는 햄버거 가게에서 나와 화장실로 바로 가지 않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윗층 가게에 갔다”고 했다.
재판부는 리 역시 공범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리가 패터슨에게 살인을 부추기고 앞장서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칼로 찌를 가능성이 있었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리도 공범으로 인정한다”고 했다.
◆ 피해자 중필씨 어머니 “그동안 사는 게 아니었다...속 시원”
피해자 중필씨의 어머니 이복수(74)씨는 이번 사건 재판 과정에서 대부분 법정을 지켰다. 이날 역시 방청석 네 번째 줄에 앉아 재판을 지켜봤다. 그는 선고가 내려지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선고 직후 그는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이씨는 법원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마음 같아서는 사형을 원하지만, 20년형이 최고형이니 마음이 후련하다. 그동안 범인이 잡히지 않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항상 중필이한테 죄 짓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씨는 검찰이 사건 직후 처음부터 패터슨과 리를 공범으로 기소하지 않은 점은 안타깝다고 했다. 이씨는 “리도 공범이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같은 죄로 두 번 재판 받지 않는다는 원칙)’를 없애고 다시 구속시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두 명 다 사람을 죽이고 서로 미뤘다. 아주 나쁘다. 검찰도 이해할 수 없다. 예전에도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돼 무죄가 돼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이날 패터슨 변호인은 “미국에서 증인이 출석하지 않고 한정된 기간에 재판이 이뤄져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항소심에서 다투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