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골목길을 돌아들어 목욕탕과 이발소, 피아노 학원을 지나면 오래된 벽돌 건물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책방. 녹슨 문이 끼익 요란한 소리를 내고, 한가운데 작은 석유 난로가 따스하게 손님을 맞는다. 대여섯 명만 들어가도 서로 움직이기 곤란할 만큼 비좁은 공간. 은은한 음악을 배경 삼아 낯설고 독특한 책들을 한 권씩 뽑아 펼친다. 바깥 세상이 아득히 멀어지고,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간다.

[동네 책방을 응원합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이야기냐고? 요즘 아늑한 동네 책방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 책방 주인이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 꿈을 용감하게 실현시킨 이들 덕분이다. 대형 서점의 규모와 인터넷 서점의 편리함 사이 틈바구니를 책방 주인의 안목과 취향으로 공략한다. 지극히 편안하고 평화로운 공간, 첫 페이지를 넘겨보는 설렘이 살아있는 곳. 그런 동네 책방을 찾았다.

◇'홍대 여신'의 서재… 책방 무사

뮤지션 요조의 책방무사

안국역에서 내려 북촌길을 오르다가 중앙고 정문에서 우회전하면 오래된 '진미용실' 간판이 보인다. '책방 무사'는 그 간판 아래 있다. '홍대 여신'으로 불리는 유명 뮤지션 요조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책을 읽는 중이다. 편하게 집어먹으라는 귤이 한 박스 놓여있다. 운 좋으면 요조가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요조의 열렬한 팬이라면 이 모든 상황이 잠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하다. 문 연 지 석 달쯤 된 이곳은 책을 사랑하는 요조의 개인 서재 같은 공간이다. 책방을 낼 때 주변 사람들이 하도 망할 거라고 걱정을 해서 '오늘도 무사(無事)하자'는 의미로 책방 이름을 정했다. 헌책과 새책, 일반 단행본과 독립출판물, 음반과 비디오테이프가 뒤섞여 있다. 기준은 하나, 요조가 좋아하는 것.

뮤지션 요조가 운영하는 서울 북촌의 동네책방 ‘무사’.

[동네 책방 ‘무사(無事)’ 낸 가수 요조]

일본 야마구치현 슈난(周南) 지역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요조가 손글씨로 쓴 몇 권의 책 추천사를 읽어본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탈북 청소년 워크숍 결과물 '우리는 서울에 산다'), '길을 걸으며 흘린 땀과 눈물을 담백하게 글자로써 채워넣은 여행 기록'(박혜미 '산티아고 여행기')…. 요조와 직원이 번갈아 책방을 맡는다. 오후 1~6시 오픈. 휴일은 SNS에 공지.

◇동화책 속으로… 책방 피노키오

책방 피노키오.

연남동 골목에 자리 잡은 '피노키오'는 온통 노란색이다. 동화에 나올 것 같은 은발의 주인이 한편에 앉아있다.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그림책이 벽과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한국은 물론 폴란드와 스페인, 우루과이, 러시아, 베네수엘라, 중국, 인도 등에서 온 원서들이다.

[[별별책방]② 단골이 찾아가는 숨은 책방 피노키오]

외국계 대사관에서 일했던 이희송(45)씨는 2013년 책방을 열면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그림책을 테마로 정했다. 아동용 도서도 있지만 어른을 위한 '그래픽 노블'(예술성 깊은 작가주의적 만화)이 더 많다. 이씨가 인터넷으로 각국의 좋은 책을 찾아 서너 권씩만 들여오기 때문에 전시된 책 대부분이 '한정 판매'인 셈이다.

세계 각국의 그림책 원서가 진열돼 있는 책방 피노키오.

그림책은 직접 만져보고 골라야 한다는 이씨의 철학 덕분에 책이 비닐에 싸여있지 않다. 남자 친구와 함께 온 최현지(22)씨는 "미술을 전공하는데 영감도 얻고, 예쁜 책 펼쳐보며 데이트하기도 좋아 자주 들른다"고 했다. 월~수 오후 12~6시, 목~일 오후 2~8시 오픈.

◇여행 같은 일상… 책방 일단멈춤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유가 발목을 잡을 땐 일단 이대역 5번 출구로 가야 한다. 오래된 주택가 한구석 푸른 페인트를 칠한 책방 앞에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여행 관련 책들을 모아놓은 서점이다. 주인 송은정(30)씨는 손님들이 책방으로 오는 길에서도 여행의 설렘을 느끼기를 바라며 고르고 골라 이 뜻밖의 장소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여행 책방이지만 정보만 담은 가이드북이 없는 것이 특징. 여행지의 분위기와 역사·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와 인문서, 여행 중에 읽으면 좋을 만한 소설과 시집, 전문 잡지와 화보집 등을 판다. 저녁엔 '나만의 여행책 만들기' '프랑스어 회화' 같은 소규모 워크숍이 열린다. 오후 1~8시 오픈. 매주 일요일(매월 마지막 주만 토·일) 휴무.

동네 책방에서 책을 읽는 오후, 한가하고 따뜻했다.

대형 서점에서도 안 파는 책을 어디서 살까

'자가(自家)출판'은 소재 제약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어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다.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서점에 내놓기 때문에 주로 여행기나 에세이 위주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덩달아 자가·독립 출판 책을 다루는 서점이 홍대 부근을 중심으로 10곳 이상 늘어났다.

독립잡지를 비롯해 국내·외 아티스트 북, 예술·디자인 관련 서적을 취급하는 일명 '셀렉트숍'은 소규모 책방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또한, 개인의 독립적 저작물을 위탁판매하거나 특정 분야를 특화한 책을 선보인다. 국내 대표 서점인 교보문고에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한 서적도 만나볼 수 있다.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