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한 재미 교포 김동석(57)씨와 한참 얘기를 나눈 뒤 물었다.
"김 선생은 로비스트(lobbyist)냐?"
그는 '90일 비자 면제 프로그램''미(美) 하원의 일본위안부 결의안''미국 의회 도서관의 독도 명칭 표기' 등에 개입돼 있었다. 모두 그가 해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쪽으로 워싱턴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나는 로비스트는 아니다. 워싱턴 로펌에서 그런 제안을 받기는 했다. '당킴(Dong Kim)'은 워싱턴 미(美) 정치인들에게 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로비스트의 몸값도 얼마나 많은 정치인과 친분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껏 해온 일을 보니 '로비'와 비슷한데, 무슨 차이가 있나?
"로비스트는 정치인들에게 '부탁'하지만, 나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으로 정치인들을 '압박'한다."
―정치인을 압박한다?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은 유권자들의 표(票)를 본다. 유권자들이 결집되면 정치인을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미국에서 한인 유권자들의 참정권 운동을 해왔다.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그는 '재미 교포 시민참여(KACE)'라는 시민단체의 대표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 유학 간 그는 1992년 'LA 흑인 폭동'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
"당시에 피해자인 한인들은 보상을 못 받고도 아무 말도 못했다. 반면 가해자들은 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했다. 미국 사회가 이럴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당시 몇몇 교민과 논의한 결과 답은 정치력 결집밖에 없었다. 1996년 LA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네 도시에서 각각 한인유권자 단체가 설립됐다."
―그게 지금까지 진행되온 것인가?
"아니, 몇 년 못 가 문을 닫았다. 내가 맡은 뉴욕만 남았다. 교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떠나온 한국의 정치에 더 관심이 있다. 교민들은 한국 정치인들이 오면 돈을 모아주지만 이런 활동에는 돈을 내지 않았다. 나는 미국 흑인 재단의 마이너리티(소수계) 활동가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해 받은 연 3만달러로 버텼다. 그때는 새벽마다 '견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교민 사회가 한국 정치판과 연결돼 분열 대립하는 얘기는 여기서도 듣고 있다.
"교민들에게 투표를 꼭 하라고 하면, '박근혜 찍어야 돼? 문재인 찍어야 돼?'하고 묻는 식이다. 나는 '재외 동포 참정권'에 반대했다가 많은 욕을 들었다. 한국 정부의 재외 동포 정책에는 문제가 많다. 자국민의 세금으로 재외 동포를 지원, 관리, 통제하려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교민들을 한국 쪽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에 세금 내는 한인은 미국의 모범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이들이 미국 유권자로서 정치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결국 한국의 국익에도 부합한다."
―한인 2·3세대는 다르지 않은가?
"이들은 반대로 정체성이 너무 없다. 미국 사회에서 출세한 이들이 많지만 대부분 백인을 흉내 낸다. 부모들이 '한인 타운에는 가지 말고 백인 친구들과 사귀어라'고 어려서부터 교육한 결과일 수 있다. 중국계 미국인은 출세할수록 집단 결속력이 강하다. 그게 미국 사회 안에서 중국인들의 힘이 되고, 그 힘으로 미국의 중국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
―김창준 연방 하원의원 이후로 워싱턴 정가에 한국계가 진출 못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센 소수계는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계 정치인'을 원하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움직여주는 정치인을 원한다. 2000년 대선 때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클린턴의 스캔들' 때문에 깨끗한 이미지의 조지프 리버먼(코네티컷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삼았다. 그러자 유대계 대표들이 리버먼에게 찾아가 '미국 내 유대인은 3%인데도 너무 힘을 행사한다고 소수계에게 외면받는 실정이다. 이 마당에 부통령 후보까지 나오면 곤란하다'고 전했다. 미국 내 소수계가 영향력을 가지려면 전략이 있어야 한다."
―김 선생의 단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왔나?
"미국에서는 시민권자가 '유권자'로 등록하면 배심원, 지역공동체 회의 참석 등 시민의 의무가 부과된다. 1세대 교민은 영어 소통이 잘 안 되고 이런 의무는 생업에 지장을 주기에 유권자 등록을 피했다. 우리는 이들을 설득해 뉴욕에서 3만명 이상 등록시키고, 선거일에는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2002년에는 투표용지에 한국어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했다(미국 내 한인은 약 200만명. 이 중 절반가량이 시민권자이고 유권자는 40만명쯤으로 추정)."
―그렇다고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종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거구 정치인들에게 한인 유권자 등록 명부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도움을 주면 표를 주겠다'고 압박할 수 있다. 교민들에게는 '어떤 후보의 정책이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식으로 알려줄 수 있다. 실제 그렇게 해서 한인 밀집 지역에서 몰표가 나왔다. 유대인들은 정치 모금으로 이렇게 압박한다."
―김 선생의 활동은 뉴욕 지역에만 국한된 게 아닌가?
"오래 활동해왔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감은 없었다. 미국 전역의 교민들에게 주목받는 성과가 필요했다. 그게 '90일 비자 면제 프로그램'에 뛰어든 계기였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과 논의해왔지만 진척이 없었던 이슈였다."
―어떻게 성사시켰나?
"한인 유권자들이 많은 뉴욕과 LA 지역의 하원의원들에게 '한국은 미국과 혈맹 관계다. 이라크 전쟁에도 파병했다. 미국인이 90일간 비자 없이 한국에 입국하듯이 한국인도 동등하게 해달라'고 압박한 게 주효했다. 정책을 바꾸려면 협상 테이블에 앉기보다 지역구 의원을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미국 교민 사회에서 알려졌나?
"교민 1세 중에는 미국에 사는 것에 일종의 우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비자면제법이 통과되니 '미국에는 아무나 오나. 불법 체류자가 양산된다. 강남의 룸살롱이 다 들어온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비자를 바꿔주는 업무로 먹고사는 뉴욕과 LA 변호사들도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 한인 사회의 이런 평판을 바꾸기 위해 이듬해 '위안부 결의안' 이슈에 뛰어들게 됐다."
―불가피하게 했다는 뜻인데?
"당시 이걸 성공 못 시키면 내 인생이 날아간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교민 사회가 늘 분열되는데 다행히 이 이슈에는 결집됐다. 석 달 만에 미 전역의 한인 교회를 통해 10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를 해당 선거구 의원들에게 보냈다. 나는 하원의원 200명의 얼굴과 이름, 경력을 다 외웠다. 워싱턴 의사당의 복도나 식당에서 이들을 볼 때마다 아는 척하며 말을 걸었다. '인권 차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돼야 한다. 당신이 지금 바쁘면 보좌관이라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2007년 미(美)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을 때 미국 언론에서는 '사라진 풀뿌리 정치 운동이 살아났다' '800만달러의 일본 로비를 이겼다' 등으로 보도했다. 그 뒤 미국 뉴저지주 등에서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졌다.
"미주 한인 100년 이민(移民) 역사 최초로 교민들 힘으로 연방의회를 움직인 사건이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위안부 문제에서 꿈쩍 않던 아베 정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일로 나는 '반일(反日)주의자'처럼 됐다. 일본 극우파의 위협이 느껴졌다."
―'반일주의자'처럼 됐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본에서는 '위안부 결의안과 기림비 제막은 한국 정부가 한인들을 부추긴 결과'라고 반격했다. 보편적 인권 이슈가 아닌 한·일 분쟁 이슈로 몰고 갔다. 한국 정치인들이나 시민단체, 일부 재미 교포들이 그런 빌미를 준 측면이 있었다. 재작년에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미 국무부를 방문하니, 그쪽 관계자가 한국에 보도된 기사들의 영문판을 내보이며 '위안부 문제는 미국의 이슈가 아니다'며 거부했다."
―이해가 안 되는데.
"한국의 아마추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압박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일본의 국력이나 위상은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데도 말이다. 위안부 문제가 미국 의회와 시민들을 움직인 것은 보편적 인권 이슈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한·일 분쟁 이슈라면 미국은 중간에 설 수밖에 없다."
―최근 한·일 정부 간에 타결된 위안부 문제 협상을 어떻게 보나?
"북핵 등 안보 이슈가 대두하는 마당에 매듭지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적으로 타결돼도 인권 문제가 덮이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협상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7년 초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위안부 할머니를 참석시킨 미(美) 의회 청문회가 열렸다. 박 대표에게서 참가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박 대표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가 '한국 정치인이 개입되면 위안부 할머니 청문회는 한·일 분쟁 사안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만류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나?'라고 묻기에, '나중에 저녁 자리에 오셔서 할머니께 봉투나 줬으면 좋겠다'고 가볍게 말했다. 그런데 정말 박 대표가 할머니 세 분에게 1000달러씩 넣은 봉투를 준비해 왔다."
―2008년 미 의회 도서관에서 독도 명칭을 '리앙쿠르 록스'로 바꾸려 할 때도 저지했다고 들었는데?
"당시 한국 홍보 전문가가 미국 유력지(紙)에 '독도는 우리 땅' 광고를 냈다. 취지는 좋았으나 미 의회 도서관 입장에서는 '독도가 분쟁 지역이구나'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독도도 다케시마도 아닌 '리앙크루 록스(Liancourt Rocks·1849년 프랑스 리앙쿠르호에 의해 독도가 서양에 알려진 데서 유래)'로 고치려고 한 것이다. 나는 한인 학생들과 함께 지역구 의원의 사무실로 찾아가 "학생 부모 중에는 독도 문제로 충격받아 일을 못 나가고 있다. 그러면 세금 내기도 어렵다. 괜히 명칭을 바꿔 한·일 간 분쟁으로 확대되면 미국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결론이 날 때까지는 지금 표기대로 하기로 유예시킬 수 있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