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아버지는 아들이 만나는 여자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아들 뺨을 때린다. 또 다른 드라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했다고 화를 못 참고 따귀를 갈긴다. 어머니는 아들 여자 친구에게 "구제불능"이라며 다짜고짜 뺨을 때리고 욕을 한다. 몇 년 전 종영한 다른 인기 드라마 속 할머니는 주인공 손자를 때리면서 "나는 널 혼내는 게 아니다. 널 가르치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가족 간 갈등을 단골 소재로 다루는 '막장' TV 드라마에서 특히 이 같은 체벌과 가정 폭력은 예사다.

최근 따뜻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케이블 채널 사상 최고 시청률로 마감한 드라마에서조차 부모는 자식한테 "×새끼" "××년" 같은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다. 공부를 안 한다,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질책하는 장면에서다.

드라마에서 그 모든 가정 폭력과 폭언이 우스꽝스럽고 낭만 가득한 '에피소드'로 미화되는 게 현실이다. 흡연하는 딸을 의심해 "이 미친×이 뒤질라고 환장을 했나, 너 오늘 뒤져볼래, ×년아" 같은 험악한 욕설과 머리칼을 잡고 흔드는 장면이 전파를 탄다. 시청자들도 이런 폭력적 순간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전문가들은 이런 드라마·영화 속 가정 폭력이 일상화된 가내 아동 학대의 '반영'인 동시에 아동 학대를 부추기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가정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거나 익살스럽게 묘사·과장해 '폭력도 정(情)'이라는 왜곡된 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지난 15일 사망 및 시신 유기로 충격을 안긴 부천 최군 사망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친아버지 최경원은 "어릴 적 친어머니에게 체벌을 많이 받았다"고 '떳떳이' 말했다. 지난해 12월 검거된 인천 '11세 16㎏ 소녀' 감금·폭행의 주범인 친부도 "어릴 때 계부한테 학대받았다"고 경찰에서 진술한 사실이 알려졌다. 흉악한 아동 학대의 두 주범이 의존하려 했던 괴(怪)논리는 '내 아이는 내 맘대로 해도 된다' '애는 때리면서 가르치는 것'이란 일부 부모의 잘못된 친권(親權) 의식과 훈육관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자식 체벌 등 가정 폭력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대중이 흔히 접하는 드라마·영화에서 쫓아내라고 주문한다. 김훈순 이화여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가정 폭력을 비롯해 TV·영화 등에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은 시청자·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을 둔감하게 또는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면서 "방송에서 흡연 장면을 없앤 것처럼 작은 폭력 묘사라도 규정을 만들어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어릴 적 학대 경험이 모티브로 구성돼 최근 종영한 드라마의 한 장면.

이소영 순천향대부천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폭력을 당한 아이는 가해 부모를 원망하다 '동일시' 과정을 거쳐 자기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된다"면서 "영상 매체부터 아동 학대를 비롯한 모든 가정 폭력을 '가정사'로 치부 또는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가정 내 공포(학대)의 습득자가 가정 내 폭군으로 자란다'는 것은 아동 학대 전문가들이 경험적 연구를 통해 강조하는 금언이다. 문영희 서울기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이 부모의 학대를 받는 것은 우리 사회 1차 보호막과 기본권이 뚫렸다는 의미"라며 "아동 학대 피해자들은 사회적 낙오자로 전락해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인이 돼 자녀·배우자를 학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는 아동 학대 예방, 조기 발견과 응급조치·보호, 빠른 회복이 사회 전체 복지 차원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사랑의 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훈육'으로 포장한 화풀이성 폭력의 경우 더욱 그렇다.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부모의 우울·불안·분노 같은 정서적 문제가 아동 학대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녀 학대 상당 부분이 부모의 '분노 조절 장애'에서 기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녀를 '보호해야 할 아동 학대 피해자'에서 '인권 보호의 대상'으로 시각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아이는 부모 말을 한 번에 알아채 예쁘게 따라 하는 존재가 아니란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