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 유라시아를 횡단한 최초의 유럽인들
쿠빌라이 칸의 통치시기에 몽골을 왕래하고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노 드 카르피니(Giovanni Plano de Carpini)와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을 아는 이는 극히 적을 것이다.
이들은 마르코 폴로보다 20~30년 앞서, 각각 구육과 뭉케 카안의 통치시기에 대몽골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로, ‘몽골의 역사(Ystoriae Mongalorum)’와 ‘몽골기행(Itinerarium)’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후대에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의 여행기 ‘몽골제국 기행’을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 최초의 세계 제국 '대몽골국'의 탄생
우선, 카르피니가 몽골로 사행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몽골고원은 9세기 초반에 위구르제국이 멸망한 후 분열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어서 거란(遼)을 멸망시킨 여진 왕조(金)는 초원 유목민의 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타타르(Tatar) 부’를 앞잡이로 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훗날 칭기스 칸이 되는 테무진(Temüjin)의 아버지 예수게이(Yesügei) 바아투르(ba’atur·용사)가 타타르부에 의해 독살당하게 된다.
이런 혼란한 상황을 ‘몽골비사’에는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수장을 잃은 몽골부의 구성원들은 열 살 전후의 어린 테무진을 버리고 떠나가 버렸다. 테무진은 기나긴 고통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을 견디고, 1206년 모든 유목민들에 의해 ‘칭기스 칸(Činggis qan)’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γol ulus· 대몽골국)'라고 정했다.
1227년, 일생을 정복전쟁으로 보낸 칭기스 칸이 탕구트(西夏) 원정 도중에 사망하자, 쿠릴타이를 거쳐 1229년에 셋째 아들 우구데이(Ögödei)가 대칸(qa'an)으로 선출되었다. 우구데이는 금(金)과 고려(高麗)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카라코룸(Qara qorum)에 성과 궁전을 짓는 한편 제국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역참(驛站·ĵam)을 재정비하여 세계 각지에서 몽골제국의 수도로 올 수 있게 만들었다. 카르피니, 루브룩, 마르코 폴로 등 중세 유럽인은 바로 이 역참망에 의해 대몽골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안내되었던 것이다.
우구데이 카안은 1234년에 바투(Batu)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제2차 서방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241년 말 우구데이는 사망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바투의 서방원정군은 일단 진격을 멈추게 되었다.
◆ 몽골과 유럽
이 무렵 이슬람과 싸우고 있던 유럽에는 이슬람 너머 먼 동쪽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국가가 있으며 그 나라를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에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이 찾아왔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을 타르타르(Tartar)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동방으로부터의 공포는 희망적인 ‘프레스터 존 전설’과 절망적인 ‘타르타르’라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유럽인들에게 다가왔다.
서유럽은 ‘지옥(Tartarus)에서 보낸 타르타르[몽골]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1245년 6월 리옹(Lyons) 공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동유럽과 러시아 방면의 동방전도를 맡고 있던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초창기부터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카르피니는 이미 리옹 공회의 개최 2개월 전에 몽골을 향해 출발한 상태였고, 교황은 회의에서 이에 대한 추인을 요구한 것이었다.
◆ 칭기스 칸 이야기
카르피니는 칭기스 칸 휘하의 몽골 군대가 흉노(匈奴) 이래 유목국가의 전통인 십진법에 기초한 ‘천호(千戶)’로 조직되었으며, 각각의 장(長)들은 칸이 지정해 준 장소를 벗어날 수 없고, 칸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일언반구도 없이 복종하고, 특히 전쟁에서 도망친 군사들과 포로로 잡힌 동료를 구출하지 않은 나머지 부대원 등은 모두 죽음을 당한다고 하여, 칭기스 칸의 위엄과 몽골 군대의 규율이 엄격함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런 강력한 몽골군이 그때까지 정복한 나라와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일일이 열거하였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와 민족은 다음과 같다. 키타이(Kytai), 나이만(Naimani), 솔랑기(Solangi), 카라키타이(Karakytai) 즉 검은 거란(nigri Kytai), 코마니아(Canana?), 쿠마에(Tumat?) … 바그다드(Baldac), 그리고 사르티(Sarti) 등이다. … 지금부터 말하려는 나라들은 용감하게 타르타르에 저항했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복속하지 않았다. 대 인디아(India Magna), 망기아[Mangia], 알란(Alanorum)의 일부, 키타이(Kytaorum)의 일부와 사히(Saxi) 등이다.”
이들 나라와 지역 이름만 보아도 대몽골국의 정복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 몽골문자
카르피니는 몽골 문자에 대해서 “몽골은 이전에는 공식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의 문자를 차용했는데, 지금 그들은 그것을 몽골 알파벳(litteram Mongalorum)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몽골이 위구르 문자를 차용한 것은 맞지만, 위구르인들에게서가 아니라 나이만 부족을 정복한 후 포로로 사로잡은 타타통가(Tatatongγa·塔塔統阿)를 통해서였다.
아울러 카르피니가 몽골 알파벳, 즉 '몽골 문자'라고 기록한 것은 '몽골 비칙(Mongγol bičig)'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정확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몽골인들이 이미 '위구르 문자'가 아니라 '몽골 문자'라고 불렀다는 중요한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카르피니보다 몇 년 늦게 몽골을 방문한 루브룩도 '그들은 꼭대기에서 쓰기 시작하여 선을 아래쪽으로 내려 적고 같은 방식으로 읽는데, 그 다음 행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각각 이어진다.'고 쓰는 방식에 대해서까지 정확한 묘사를 하였다.
◆ 구육 카안을 알현하다
카르피니 일행이 도착하자 구육은 그들의 관습대로 막사와 양식을 제공해주었으며, 그들에게 특별히 더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구육은 카르피니 일행을 자신의 어머니 투레게네(Töregene)에게 보냈다. 그 곳에는 2000명도 더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몽골 궁정에 도착한 사절은 우선 궁정 밖 수백 미터 전에 말에서 내린 다음, 수석서기가 호명하면 궁정 앞으로 간다. 카르피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는 칭카이(Čingqai)가 수석 서기였고, 루브룩이 방문했을 때는 불가이(Bulγai)가 최고의 대신이었다.
그런 다음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등 금기 사항을 듣고 칼이나 무기를 숨기지 않았는지 철저한 몸수색을 받고 동쪽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칸을 선출하는 장소에 대해 카르피니는 ‘시라 오르두(Šira ordu·황금색 궁정)’라고 정확하게 적었으며, 그 곳에서 벌어진 대칸의 즉위 광경에 대해 “첫째 날 그들은 하얀 벨벳 옷을 입었고, 구육이 오는 날인 둘째 날에는 모두 빨간색 옷을 입었다. 셋째 날에는 파란 벨벳으로 된 옷을, 넷째 날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라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런 다음 카르피니는 다시 한 번 호출되었는데, 이번에는 교황의 서신에 대한 대칸의 답신을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구육 카안의 답신을 번역하고 적는 과정에 대해 카르피니는 마치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처럼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 때 몽골어 원본과 함께 한 통의 페르시아 번역본이 만들어졌고, 게다가 카르피니는 다시 라틴어로 적었다. 이전에는 라틴어 본만 알려졌었는데, 1920년 바티칸 공문서보관소에서 페르시아어본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페르시아어 판본에도 구육 카안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몽골어본과 함께 페르시아어본도 ‘구육 카안의 국서’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르피니는 구육 칸을 직접 만나본 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술했다.
“지금 황제는 마흔에서 마흔 다섯 쯤 또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매우 지적이고 상당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태도는 심각하고 진지하다. 그는 가벼운 이유로도 웃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고, 어떤 경박함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런 말을 그와 같이 지내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들었다. 그의 집안에 있는 기독교도들은 그(구육)가 기독교도가 되려고 했던 것에 대해 확고하게 믿으며 또한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기독교의 물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항상 텐트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
이 서술은 마치 구육이 기독교도인 것으로 적고 있다. 물론 구육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 비해서 특별대우를 해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등거리 종교정책이었던 바, 각자 자신이 속한 종교가 마치 특혜를 받고 있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나타낸 것이다.
◆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과 이방인들
카르피니는 대몽골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대해서도 “이 땅은 백분의 일도 비옥하지 않고, 흐르는 물로 관개를 하지 않는다면 과일이 열리지도 않으며, 실개천은 몇 개 있지만 강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그 곳에는 카라 카롬(Cara-carom)이라고 불리는 꽤 큰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마을이나 도시가 없다. 우리는 그 도시를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황제의 가장 큰 숙영지인 시라 오르다(Syra-Orda)에 있을 때 그 곳은 반나절 정도면 여행할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웠다”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카라 카롬(Cara-carom)’은 카라코룸(Qara-qorum)을 말하며, 중국 측 한문 기록에는 코룸(qorum)의 음에 따라 화림(和林)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시라 오르다(Syra-Orda)’는 시라 오르두(Sira ordu)로 구육 카안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다.
루브룩은 카라코룸 도시 전체 규모에 대해서 얕보는 투로 생-드니(Saint Denis)보다 못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도시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는 시장이 있는 사라센 상인들의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키타이(중국) 장인들을 위한 구역이며, 궁전이 있는 구역은 따로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카라코룸에 거주하는 키타이인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 온 장인들이며, 사라센인들은 대부분 상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진흙으로 만든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으며 네 개의 문이 나있다고 한다. 그 네 개의 문밖에는 각각, 동쪽 문에서는 수수와 여러 다른 종류의 곡식을 팔고 서쪽 문에서는 양과 염소가, 남쪽 문에서는 소와 마차가 그리고 북쪽 문에서는 말을 파는 장이 선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카라코룸의 종교시설에 대해서는 “열두 개의 다른 사람들이 속해있는 우상숭배 사찰이 있고, 마호메트의 종교를 선언하는 두 개의 모스크들이 있으며 마을의 끝에 하나의 크리스트교 교회가 있다.”고 서술하였다.
루브룩은 뭉케 카안을 위해 아이락(airaγ, 마유주), 포도주, 검은 쿠미스(정제된 마유주), 보알(蜂蜜酒), 테라키나(쌀술) 등 다섯 가지 음료가 나오는 ‘은제(銀製) 나무(mönggün mod)’를 제작한 파리 출신의 장인 기욤 부시에(Guillaume Buchier)를 만났으며, 그의 양아들 바실이 몽골어를 아는 훌륭한 통역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바실은 뭉케 카안이 궁정에서 각 종교의 우위 논쟁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도록 했을 때 루브룩의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다.
◆ 카르피니와 루브룩, ‘솔랑기(高麗)인’을 묘사하다.
칭기스 칸은 1206년 몽골초원을 통일한 다음, 이어서 주위의 세력을 정복하기 위한 대외원정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과 집단이 차례대로 대몽골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주로 위구르 등 투르크 계통과 거란 출신의 인재들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점차 무슬림과 탕구트, 여진인과 북부 중국의 한인들까지도 참여하게 된다. 칭기스 칸이 몽골초원을 통일한 직후 이러한 상황에 대해 ‘몽골비사’에는 “그 뒤에 아홉 가지 언어의 사람들(yesün keleten irgen)이 텝 텡게리에게로 모여”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아홉 가지(yesün)’이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9’라는 숫자를 적은 것이 아니라 몽골어에서 헤아릴 수 없이 아주 많은 수나 종류를 말할 때 쓰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 만큼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몽골초원에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 중에서 카르피니의 관심을 끈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솔랑기(Solangi)', 즉 고려(高麗)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카르피니는 여섯 차례, "그들이 정복한 나라와 민족은 키타이, 나이만, 솔랑기, 카라키타이…" "우리는 칸의 궁정에서 …솔랑기의 수장을 보았는데…" "이 나라의 동쪽에는 키타이 사람들의 나라와 또한 솔랑기라는 나라가 있고…" "나중에 … 몇 명의 키타이와 솔랑기의 수장들이…" "서기인 친카이는 …솔랑기와 다른 나라의 수장들의 이름을 적고나서…" "오히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솔랑기의 지배자의 경우처럼 그들이 직접 나서서 완전하게 통치권을 장악했다" 등이다.
그리고 루브룩도 고려에 대해 각각 솔랑가(Solanga)와 카울레(Caule)로 두 번 언급했다. 특히 루브룩은 고려 사절에 대해서 “그들(Solanga)은 작았고, 스페인 사람들처럼 피부가 거무스름했으며, 기독교 부제들이 입는 겉옷처럼 생겼으나 조금 좁은 소매가 있는 튜닉을 입었다. …그리고 매우 장식적인 머리 모양이 만들어진다”고 했고, 이어서 “카타이아(Cataia) 너머에 한 나라가 있는데(Caule·고려), 몇 살이든 간에 그 나라에 들어가면 그 때의 나이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장인 윌리엄은 그가 어떻게 섬에 살고 있는 카울레(Caule)와 만세(Manse)로 알려진 사람들의 사절단을 보았는지 나에게 설명했다”고 아주 정확하고 자세한 묘사를 했다. 17세기 이후의 ‘몽골문 연대기’에도, 그리고 오늘날 몽골인들도 한반도의 사람과 국가를 지속적으로 ‘솔롱고스(Solonγos)’라고 부른다.
◆ 카르피니는 교황이 보낸 간첩?
카르피니가 판단하기에 자신이 보고들은 몽골은, 비록 새로운 대칸이 된 구육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이기는 하였지만, 결코 쉽게 기독교로 개종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특히 교황의 편지에 대한 구육 카안의 답장을 받아든 카르피니는 많이 당황하였을 것이다. 교황은 몽골을 대등한 관계로 생각하고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인데, 몽골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칸 구육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영원한 하늘의 힘에 의해, 모든 백성의 바다와 같은 칸의 명령이다. …신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에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그 땅을 장악하였다. …만약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당신에게 알린다. 만약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우리가 어찌할 것인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다.”
몽골의 ‘세계정복 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문서를 전하게 된 카르피니와 읽게 된 교황은, 분명히 몽골이 다시 유럽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카르피니는 ‘타르타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의 전쟁 방식과 군율, 무기 상황을 자세히 관찰하고 정보를 입수하였다. 아울러 방비책에 대해 자세한 서술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사전정보조차 불충분한 상황에서 몽골에 다녀온 카르피니의 여행기록은, 비록 4개월 정도의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카르피니의 몽골어와 몽골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보이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구육 카안이 교황에게 사신을 파견하려고 하자 카르피니는 이에 대해 냉철하게 대응하였다. 결국 몽골 사신과 함께 교황에게 되돌아가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카르피니는 여러 차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그 이유는 ‘타르타르(몽골)’가 기괴한 존재들 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들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결국 타르타르는 ‘인간’이 아닌 ‘지옥(tartarus)에서 보낸 악마’와 같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1253~1255년에 몽골을 방문한 루브룩이 보다 객관적인 여행기록인 ‘몽골기행(Itinerarium)’을 남겼지만, 유럽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은 베스트셀러는 카르피니가 쓴 ‘몽골인의 역사(Ystoriae Mongalorum)’다.
이후 유럽은 지속적으로 아시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쿠빌라이 카안이 대몽골국의 중심을 대도(大都)로 옮기자 몽골고원으로 향하던 발길도 끊어지고, 몽골고원에 존재했던 이방인과 이문화의 흔적과 기억도 급속하게 희미해져버렸다. 그들은 이제 대몽골국의 새로운 중심 칸 발릭(Qanbaliγ·大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 김장구(金壯求)
동국대학교 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중앙아시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몽골국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몽골사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문명교류사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는 몽골문 사료, 불교경전 역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주 몽골 황금사’ ‘중국 역사가들의 몽골사 인식(공저)’ 등을 썼고, ‘몽골 세계제국’ ‘몽골의 역사’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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