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현기환 정무수석이 15일 정의화 국회의장을 찾아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경제·노동 관련 법안들을 의장이 직권(職權)으로 상정해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 수석은 이 일을 스스로 공개하면서 "(국회가) 선거법만 직권 상정한다는 것은 국회의원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비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법을 먼저 통과시켜 주시고 선거법을 처리하는 순서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앞서 정 의장은 새로운 선거구 획정안을 담은 선거법 개정안이 연말까지 통과되지 않으면 현행 국회의원 선거구가 모두 사라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면서 연말쯤 직권 상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국회법에 따르면 직권 상정 요건을 '국가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있다. 정 의장 판단으로는 선거구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정 의장은 그러나 여당이 요구하는 경제·민생 법안 등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직권 상정에 부정적 입장을 밝혀 왔다. 여당 의원총회에서 "의장의 직무 유기"라는 말이 나오자 정 의장은 "말을 함부로 배설하듯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여당 출신 국회의장과 여당이 정면충돌하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청와대 수석이 국회의장을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현 수석이 말한 '국민이 원하는 법'은 정부가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중복 투자 업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일명 원샷법, 노동 개혁 5법 등이다. 하나같이 우리 경제의 체질을 바꿀 만한 시급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내년 초부터 선거 국면으로 빨려들면서 5월 말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국회 심판' 같은 무리한 표현까지 써 가면서 국회를 압박한 것도 이런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회가 마비 상태에 이른 1차 책임은 법안 심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야당이 질 수밖에 없다. 야당은 15일에도 이 법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5개 상임위원회를 보이콧했다. 아예 참석을 하지 않거나 야당 소속 상임위원장이 10분 만에 회의를 끝내는 수법을 썼다. 법안 내용에 일부 이견(異見)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심의까지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과 사정을 감안한다 해도 청와대 태도는 납득하기 힘들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법안 통과를 위해 문재인 대표나 다른 당직자들과 식사는커녕 차 한잔 나누거나 전화 한 통화라도 해본 적이 없다. 여당은 물론 야당과 대화 창구 역할을 맡아야 할 현기환 정무수석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런 대화 노력을 일절 생략한 채 직권 상정해달라는 것은 국회 논의는 건너뛰고 무조건 방망이를 쳐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민주국가의 논의·합의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현 수석이 '국민이 원하는 법'과 '국회의원 밥그릇'이라고 말하는 태도에선 청와대가 국회와 국민을 가르려는 것 아니냐는 느낌마저 준다. 청와대가 아무리 급하다 해도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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