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신경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이성진(39·남)씨는 고민이 많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안정적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해 나갈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해외로 나간 인재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이혜련씨(37·여)도 상황이 비슷하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이 씨는 “미국에서는 기업이나 학교의 박사급 연구자라면 지위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경향이 있어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생명과학 분야 해외 우수 한인 과학자 유치를 위해 미국 4개 대학 순방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연구 활동 중인 우수한 박사급 연구자를 국내에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연구자들을 만나고 IBS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지 한인 과학자들은 ‘5년 뒤, 10년 뒤에도 내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안정감’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전제라는 의견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 두뇌유출 지수 하위권…돌아오라, 한국으로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발표한 한국의 두뇌유출 지수는 3.98로 하위권이었다. 이 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해외에서 근무하는 인재가 많음을 의미한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인재는 해외 취업 기회가 적기 때문에 이 지수는 사실상 이공계 분야 인재들의 두뇌유출을 의미한다.
2013년 기준으로 조사 대상 60개국 중 두뇌 유출이 가장 적은 국가는 노르웨이(1위·8.27), 스위스(7.56), 핀란드(6.83), 미국(6.82)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44위로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학기술계는 고급 인력을 유인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연구 환경이 국내에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IBS는 이같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5일 미국 스탠퍼드대 리카싱센터에서 ‘콜리스(KOLIS·Korean Life Science in the Bay Area)’와 함께 해외 연구자 면접 및 IBS 소개 행사인 ‘글로벌 탤런트 포럼(GTF)’을 시작했다. 이어 7일 미국 위스콘신대, 8일 ‘뉴잉글랜드생명과학협회(NEBS)’, 9일 록펠러대에서 ‘뉴욕한인생명과학자모임(NYKB)’과 만남이 이어진다. 콜리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대학인 스탠퍼드대, UC버클리, UC데이비스, UC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생명과학 분야 박사후연구원, 박사과정 대학원생 등이 1986년에 만든 학술단체다.
유영준 IBS 연구지원본부장(광주과기원 생명과학부 교수)은 “현재 미국에서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과학자들의 커뮤니티가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며 “앞으로 물리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이 같은 자리를 만들어 IBS에 대해 알리고 우수 한인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연구 독립성 보장하고 성과위주 관행 혁신해야
미국 현지에서는 스탠퍼드대의 이성진씨와 이혜련씨처럼 한국에 돌아가서 연구 활동을 지속하고 싶지만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인재들이 많다.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전전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규영 IBS 혈관연구단장(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과 김진수 IBS 유전체교정단장(서울대 화학부 교수), 김성기 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장(성균관대 글로벌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학과 교수) 등 3명의 생명과학분야 연구단장과 유영준 IBS 연구지원본부장이 함께 한 현지 간담회에서 현지 연구자들은 “우수 인재들이 원하는 첫 번째 직장은 바로 교수”라며 “원하는 연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장인정신’을 본받고 창의 연구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성진 박사는 “성과 위주의 한국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수 인재 유치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도전적인 연구에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UC버클리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준연씨(24·남)는 “한국은 승자독식 사회로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인식이 있다”며 “미국은 실패해도 길이 있고,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고 밝혔다.
31년 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IBS 연구단장으로 귀국한 김성기 교수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국내 연구환경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며 “IBS가 기초과학의 새로운 연구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준 본부장은 “IBS는 박사후연구원이 창의력을 발현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학생들의 바람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