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붕어빵(위)과 일본 붕어빵 ‘다이야키’(아래).

내 고향은 경상남도 마산(2010년 통합 창원시가 되었다)이다.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간 마산의 재래시장에는 가마보코, 다쿠앙이 있었다. 시장 좌판에서 우동을 참으로 먹었다. 내가 살던 동네의 골목에는 조그만 단팥빵 공장이 있었다. 경주 황남빵보다는 조금 크고 지금 제과점에서 파는 단팥빵보다는 작았다. 구멍가게에는 센베이와 색색의 일본식 사탕이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면 팥을 입힌 경단인 당고, 청미래덩굴 잎으로 싼 모치인 망개떡을 먹을 수 있었다. 빙수도 여기저기에서 팔았다. 얼음을 빙설기로 갈아 붉거나 노랗거나 파란색의 시럽을 끼얹었다. 팥빙수도 있었다. 겨울이면 붕어빵 또는 국화빵을 먹었다. 오뎅도 먹었다. 소풍 도시락으로는 김밥을 쌌다. 도시락을 그때는 다들 '벤토'라 하였다. 가끔은 시내의 경양식집에서 돈가스와 함박을 썰기도 하였다.

어릴 적에 나는 이 모든 음식의 '국적'에 관심이 없었다. 맛나기만 하면 되었다.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다. 생선회도 마산의 어른들처럼 '사시미'라 불렀다. 학교에 다니면서 일제의 잔학상을 알았다. 일제는 북한만큼 '나쁜 나라'였다.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교육도 받았다. '가마보코' 대신 '어묵', '다쿠앙' 대신 '단무지', '모치' 대신 '찹쌀떡', '사시미' 대신 '생선회' 등의 순화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와리바시, 쓰키다시 따위의 일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에게 짜증이 난 눈길을 보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음식의 유래를 낱낱이 다 일러주지 않아서 일본말로 불리는 음식 정도만 일본에서 온 줄 알았다. 단팥빵·빙수·붕어빵·국화빵·김밥 등은 원래 이 땅에 있던 음식인 줄 여겼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에 왔다. 서울의 여러 음식이 마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단팥빵·빙수·붕어빵·국화빵·김밥이 전국 곳곳에 다 있었다. 그러다 일본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어릴 적 내가 먹었던 음식 대부분이 일본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놀랐다가 이내 울적해졌다. 식민(植民)은 민족의 굴욕이라 배워왔는데 그 굴욕의 시대에 일제에 의해 이 땅에 이식된 음식으로 내 유년의 추억이 채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붕어빵은 일본의 '다이야키(たい�き)'다. 일본에서는 '도미(다이·�)'인데 우리 땅에 와서 '붕어'라 한 것만 다르다. 국화빵도 그 계열 음식이다. 빵틀에 반죽을 붓고 팥을 넣는 것은 모두 일본의 개발품이다. 모양이 국화…. 이건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을 연상시킨다. 빙수는 1920년대에 일본 본토 음식임이 강조되며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에 빙수집이 많았는데, 조선 청년에게 게다(일본식 나막신) 신기고 유카타(일본식 목욕가운) 입혀 일본말로 호객하였다. 김밥은 '후토마키'의 변형이다. 달걀과 푸성귀 등의 배합으로 보아 현재의 한국 김밥과 거의 같다. 1924년에 출간된 요리책 '조선무쌍 신식요리 제법'에 후토마키 조리법이 실려 있는데, 이를 '스시'라 쓰고 있다.

음식에는 국경이 없다. 맛있는 음식은 국경을 넘나들게 되어 있다. 일본에도 한국서 유래한 음식이 있다. 그러나 "한국 음식 중 많은 것이 일본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친일파'란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다. 근거 없는 '원조 논쟁'으로까지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 감정이 음식에 달라붙은 결과다. 한국 음식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나 역시 이런 까닭으로 가끔 '친일파'라 손가락질 받는다.

인간의 삶이란 대개 거창하지 않다. 어떤 인간에겐 사사로운 추억이 국가와 민족의 역사보다 더 소중할 수 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달콤했던 내 유년의 '맛'이 때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