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망한' 축제가 있다. 지난 10일 서울 잠실 보조경기장에서 열린 '과자전(展)' 얘기다. 사람들이 직접 만든 과자, 디저트류 등을 파는 일종의 '디저트 벼룩시장'. 열기는 주최 측 예상을 초월했다. 5000원짜리 예매 티켓 1만6000여 장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130여 팀의 판매자가 만든 과자 대부분이 팔렸다. 과자전에 입장하려고 3시간 동안 줄을 섰다는 김진형(27)씨는 "대기업이나 빵집에서 만들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똑같은 과자 대신 신선하고 멋진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이 축제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새치기와 싹쓸이가 발생, 곳곳에서 시비도 벌어졌다. 문화평론가 하재근씨는 "오랫동안 하위문화 취급받던 '굿즈(Goods·상품)' 문화가 어엿한 대중문화로 성장했음을 알린 사건"이라고 평했다.
굿즈는 특정 가수나 영화, 배우 등 주로 대중문화 콘텐츠를 재가공해 만들어진 상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수 사진이 들어간 엽서나 티셔츠 같은 것이다. 요즘엔 꼭 문화 콘텐츠와 관련이 없어도 개인이 직접 만든 것이라면 과자나 가방, 머그컵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굿즈'로 통칭하는 추세다.
굿즈 문화의 토대는 10~20대 중심의 '덕후(골수팬을 뜻하는 은어)' 문화다. '굿즈'라는 말도 이 문화가 먼저 발달한 일본에서 널리 쓰이던 것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다. '과자전'에 자기가 만든 과자를 팔러 나온 이들은 '과자 덕후'를 자처하는 이들이다. 아이돌 가수의 골수팬들이 만드는 '비공식 굿즈'는 공식 굿즈보다 인기가 많다. 고성능 카메라를 가진 팬들이 아이돌 공연 사진과 영상을 찍어 사진첩·DVD·달력 등을 제작한다.
덕후 문화는 1990년대 태동했지만, 최근 미디어의 발전으로 폭발적인 성장 중이다. 스마트폰은 전국에서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을 손쉽게 묶어준다. DIY(스스로 만들기) 열풍 덕분에 웬만한 물건을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방구석에서 혼자 틀어박혀 취미에 탐닉하는 음침한 덕후 이미지는 옛날 얘기가 됐다. 이들이 모여 교류하며 취향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 제작한 물건을 전시하고 거래하는 장터도 열린다. 이름하여 '온리전(only+展)'. 오직 좋아하는 대상만을 주제로 전시를 연다는 뜻이다.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장소를 빌리고 판매자를 모으고 부스를 차리고 물건을 거래한다. 관람객 500명 정도부터 1만명이 넘는 규모까지 다양하다.
굿즈의 가치는 희소성에 있다. 그 분야에 애정을 가진 개인이 개성을 담아 만든 물건이다.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과자 같은 것은 1000~5000원 정도지만, 공들여 만든 물건은 100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될 때도 있다. 취업이나 연애, 결혼을 포기하고 취미 생활로 보이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 모습을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굿즈는 되는 일이라곤 없는 현실 대신 몰입할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은 돈까지 된다. 엑소 같은 인기 아이돌의 굿즈를 만들어 파는 김모(22)씨는 "월 300만~500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이달 중순 젊은 미술가들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굿즈 2015'라는 전시 겸 장터를 열었다. 화랑이나 아트페어 같은 곳에서 전시·판매할 기회를 얻지 못한 80여 명의 미술가가 직접 부스를 차리고 작품을 팔았다. 5일간 7000여 명의 관객이 왔고 9000만원어치 넘게 팔렸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외치며 문화 콘텐츠 육성 사업에 수십억원씩 쏟아붓는 사이, 저잣거리 젊은 청춘들이 자발적으로 일궈가는 또 다른 창조경제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