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평균 키가 한계에 도달한 것일까. 지난 24일 서울시교육청은 '2015 간편한 서울교육통계'에서 "서울 고3 남학생 평균 키가 2004년 173.6㎝에서 지난해 173.4㎝로, 여학생은 161.8㎝에서 161㎝로 약간씩 줄었다"고 밝혔다. 성인 키도 마찬가지다. 만 19세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병무청 신체검사 결과를 보면 2011년 173.9㎝로 최고를 기록했다가 이후 계속 하락해 작년 173.5㎝를 기록했다.

선생님이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의 키를 재고 있다. 뒷줄에선 친구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한 아이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

1900년대 165㎝였던 한국인 남성의 평균 키는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하다 2000년 이후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전문가들은 공부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을 주원인으로 꼽고 있다. 운동이 부족해 성장판 자극이 줄었고 수면 부족으로 성장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국인 평균 키가 '유전적 한계'에 부딪힌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한국인 평균 키는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유전이 키에 미치는 영향 80%… "영양은 이미 충분"

키 성장에는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계는 유전적 요인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지난 2014년 10월 과학잡지 '네이처 유전학'에는 지금까지 발표된 키 유전자 관련 연구 데이터를 모아 분석한 결과 유전자가 키에 미치는 영향이 80% 정도라는 내용의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한국인의 경우 지난 30여년간 키가 큰 것은 주로 환경적 요인 때문이라는 게 과학계와 의료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마디로 그 전에는 못 먹고 못살았다는 뜻이다. 현재 20대인 자녀는 50대 부모보다 키가 큰데 그 이유는 유전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가 아니라 부모 세대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유전자의 최대치만큼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영양=키' 공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서 키와 관련된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성미경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섭취하는 영양분은 권장량의 100%에 가깝다"며 "일부 청소년에겐 과잉 영양 공급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기술표준원 조사에 따르면 2003년 한국 여학생은 만 13세에 성장이 둔화됐는데 2010년에는 성장 둔화 연령대가 만 12세로 낮아졌다. 영양이 넘치면 어릴 때 성장은 빠르지만 대신 성조숙증이 찾아와 성장판이 빨리 닫히게 된다.

영양이 풍부한 시대에 접어들면 자녀의 키는 부모의 유전적 특성을 공평하게 물려받는다는 주장도 있다. 박광원 고려대 구로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풍요의 시대엔 자녀들이 부모의 키 유전자를 반반씩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는 키에 우열성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모와 곱슬머리 중에는 우성인 곱슬머리 유전자가 발현될 확률이 높지만 키 유전자는 우성·열성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한다.

유전적 요인이 중요하다면 한국인의 평균 키는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박광원 교수는 "한국인의 키가 앞으로 2~3㎝ 정도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네덜란드 국민의 평균 키(185㎝)까지 커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영양·환경적으로 우리보다 앞섰던 일본인의 평균 키가 170.7㎝로 우리나라보다 작고 폴란드인의 평균 키(178.5㎝)가 지리적으로 인접한 독일의 평균 키(181.5㎝)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게르만족이 대다수인 독일과 달리 폴란드인은 아시아계 혈통을 일부 갖고 있다.

"키에 관한 통일된 견해는 없어"

전문가들은 "유전적 영향이 막대하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의 키를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박승찬 하이키한의원 원장은 "174㎝ 유전자를 180㎝ 유전자로 만들기는 어렵지만 180㎝까지 클 수 있는 아이도 영양과 생활 습관이 나쁘면 170㎝밖에 자라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유전적 요인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명철 충남대 생물과학과 교수는 "10년 정도 평균 키가 정체돼 있다고 해서 지금의 키가 한계치인지 아닌지 판단할 단계는 아니다. 키를 좌우하는 결정적 유전자도 밝혀지지 않았고 어디까지를 유전적 요인으로 봐야 할지 통일된 견해도 없다"고 했다.

실제로 1800년대 165㎝였던 네덜란드인의 평균 키가 200년 만에 20㎝ 자란 것에 대해서도 세계 과학계는 명확한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노르만족 유전자 자체가 키 큰 유전자였지만 영양분이 충분하지 못해 뒤늦게 발휘되었다는 의견부터 복지 수준이 높아서라는 주장, 키 큰 남성이 더 많은 자식을 낳은 결과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향숙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박사는 "염기서열 차이 하나도 큰 유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변화된 성염색체가 자식에게 전달될 경우 한국인 평균 키가 10㎝ 이상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