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3구(區)의 '노트르 담 드 나사렛' 거리. '비건의 세계(Un Monde Vegan)'라는 녹색 간판을 단 작은 가게가 자리 잡고 있다. 33㎡(10평)쯤 되는 매장에서 각종 빵과 과자, 소스, 즉석식품, 음료수 등을 판다. 그런데, 이곳에는 동네 수퍼마켓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다. 탄산음료와 육류를 팔지 않는다. 유리창에는 '식물성 쇠고기·돼지고기, 우유가 없는 식물성 치즈'를 판다는 선전 문구가 붙어있었다.
냉장고에는 '생선 맛 스테이크'라는 제품이 전시돼 있다. 성분 표시표에는 '밀과 유채씨 기름, 곤약, 녹말가루' 등이 주재료로 기재돼 있다. 직접 요리를 해보니, 고소하고 담백한 흰살 생선 맛이 났다.
이 가게는 이른바 '비건 제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비건(Vegan)은 육류·어류는 물론, 동물에게서 추출한 재료도 전혀 먹거나 사용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말한다. 매장에서 만난 오드(27)씨는 "5년 전부터 육류를 먹지 않았는데, 올해부터는 온전히 '비건'으로 살고 있다"며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엄격한 채식주의를 일컫는 '비거니즘(Veganism)'이 확산하면서, 관련 산업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비건의 세계' 운영자인 장 뤼크 지거는 "오리나 거위의 간이 아닌 감자와 토마토, 해바라기 기름 등을 이용해 만든 '가짜 푸아그라'를 지난 2년간 4만개나 팔았다"며 "올해 들어 전반적인 매출이 작년보다 30% 정도 늘었다"고 말했다.
◇우유·계란도 거부 '비건' 유행
파리 5구에 있는 '비건 폴리'는 빵집이지만, 빵에 필수적인 재료로 알려진 버터와 우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버터 대신 올리브 오일이나 볶지 않은 참기름, 우유 대신 두유 같은 비(非)동물성 재료만 사용한다. 파리의 '42더그레(degrés·온도)'라는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유럽에서 '비건 산업'의 선두 주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 최초의 비건 식품 전문 유통업체인 '비건즈(Veganz)'가 2011년 베를린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독일 지방 도시로 확장했다.
영국 런던에도 '웨이팅 룸(Waiting Room)'이나 '나마(Nama)' 등 비거니즘을 위한 유명 레스토랑들이 생겨나고 있다. 올해 말에는 독일의 '비건즈'가 영국에 문을 열 예정이다. 지난 3월에는 '비틀스' 멤버인 폴 매카트니 등이 참여해 처음으로 '일주일간 육류 안 먹기' 캠페인이 민간 차원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유명 요리사인 레이철 쿠가 비건 음식재료만을 이용한 요리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영국의 '비건 협회'에 따르면, 2006년 비건 인구는 약 15만명이었는데, 현재 그 수는 두 배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영국에서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음료의 매출이 2011년 3600만리터에서 1년 동안 9200만 리터로 2배 가까이 늘었다.
비건 제품은 특히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다. 스웨덴의 동물권리협회가 지난해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의 약 10%는 자신을 비건이나 채식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 층에선 그 비율이 17%까지 높아진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대안으로서의 비건'이라는 단체의 파스칼 사지 회장은 "비건주의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도덕주의"라며 "동물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말했다.
◇비식용 제품으로 확산… 민간 차원 인증 마크도
'비건 산업'은 단순히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생활용품도 가능한 한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2010년 설립된 프랑스 기업 '라마쥐나'는 샴푸·비누·치약·화장품 등을 만들면서 동물에게서 추출한 내용물은 철저히 배제한다. 작년 12월 이후 월평균 매출은 5만유로로 설립 초기보다 10배나 늘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벨기에 등 10여개국에 진출했다.
파리의 채식주의 디자이너인 마리옹 아나니아가 세운 '굿 가이즈'는 동물 가죽 대신 천연고무와 헝겊 등으로 신발을 만들어 프랑스·독일·일본 등 50여 판매처에 공급하고 있다.
'비건 제품'은 소비자가 제품의 재료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 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인증하는 마크를 제품에 부착하고 있다.
영국에 본부를 둔 '비건 협회'는 생산자가 신청한 제품의 성분을 일일이 확인해 꽃이 그려진 '비건' 마크를 부여한다. '유럽 채식주의자 협회'는 고기·생선류뿐 아니라 양계장에서 생산한 계란 등도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 제품에 인증 마크를 부여한다. '동물 실험'을 진행하지 않은 화장품에는 '잔인한 실험 금지'라는 표시를 붙여준다.
하지만 '비건주의' 확산에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2011년 80인 이상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 급식에 반드시 일정량 이상의 육류와 생선, 과일, 유제품 등을 공급하도록 했다. 채식주의자들은 급식 대신 도시락을 싸올 수밖에 없다.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비건주의를 포함해 사실상 채식주의를 학교 식단에서 금지한 조치라는 해석이었다.
☞비건주의(Veganism)
채식주의는 육류·생선류를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우유와 유제품, 가죽처럼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들도 전혀 먹거나 사용하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비건주의라고 한다. 이들은 심지어 꿀도 먹지 않는다. 건강 증진이나 생명 보호 차원을 넘어 동물의 생태를 자연 그대로 보호하겠다는 생각에 따른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