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전통적 사회계층 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최하위 계급인 '달리트'(불가촉천민)에 속한 남성이 상위 계급인 '자트'(농민) 여성과 사랑에 빠져 달아나자 마을 평의회가 남성의 여동생들에게 '윤간(輪姦)'과 '나체 행진' 형(刑)을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여동생들은 마을에서 도망쳐 인도 대법원에 보호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다.
29일(현지 시각)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인디펜던트 등에 따르면,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州) 한 농촌에 사는 미낙시 쿠마리(23·여)와 쿠마리의 여동생(15)은 마을 평의회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나체로 행진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자 마을에서 도망쳤다. 이들은 수도 델리로 가 인도 대법원에 “자신들과 가족들을 보호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쿠마리 자매와 이들의 가족들은 ‘달리트’로,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천한 신분에 속한다. 달리트는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등 카스트의 주요 4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불가촉 천민’으로 불린다.
쿠마리 자매의 곤경은 오빠가 상위 카스트인 ‘자트’에 속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됐다. 오빠는 지난 2월 이 여성이 같은 카스트의 한 남성과 강제로 결혼하게 되자 함께 도망쳤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가족들이 경찰에 고초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마을 평의회는 오빠가 저지른 일에 대한 보복으로 이 가족이 치욕을 당해야 한다면서 벌을 내렸다. 도망을 한 것은 오빠였지만, 벌을 받게 된 것은 쿠마리 자매였다. 마을 평의회는 자매가 마을 남성들로부터 집단적으로 강간을 당한 뒤, 얼굴을 검게 칠하고 나체로 행진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카스트 제도뿐 아니라 ‘캅 판차야트’이라는 인도 농촌의 오래된 관행 때문이다. 인도 농촌에서는 마을 원로들로 이뤄진 평의회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벌을 내릴 권한을 갖고 있는데, 원로는 모두 상위 카스트 소속의 나이 많은 남성이다. 마을 평의회는 전통적인 형벌이라며 ‘범죄자’들에게 이른바 ‘명예 살인’이나 ‘윤간형’ 따위를 내려 문제가 되고 있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 헌법을 제정하면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카스트 제도를 부인했지만, 인도 사회에는 아직 카스트 제도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인도 대법원은 마을 평의회의 재판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쿠마리 자매의 탄원을 지원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도 “어떤 것도 이 같은 혐오스러운 형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마을 평의회는 농촌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쿠마리 자매는 아직 마을로 돌아가면 윤간형을 당해야 하는 처지라고 텔레그래프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