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에 파고드는 한국 혐오 신드롬
국가와 사회에 적개심을 가진 요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지옥'에 빗대 신조어를 탄생 시켰다.
'스펙이 낮으면 스펙을 높이라고 하고, 스펙이 높으면 눈높이를 낮추라는 국가' '젊은이들의 아픔을 청춘으로 치부하는 국가' '사회가 잘못돼 취업을 못해도 개인 노력이 부족해 취업이 안 되는 거라 말하는 국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이용자 참여 백과사전 디시위키에서 '헬조선' 항목을 검색하면 이런 정의들이 뜬다. 이 냉소적인 국가관을 담은 단어 '헬조선'이 20~3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 일부 젊은이들은 단순한 반항이나 불만의 수준을 넘어 사회나 국가, 기성세대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치기로 보기에는 그 뿌리가 깊고 정도가 심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심지어 대한민국이 지옥 같은 곳임을 보여주는 이슈들을 모으는 '헬조선' 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사이트까지 개설됐다.
[망한민국·헬조선… 우리 청년들은 왜,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부르게 됐나]
헬조선 정서의 확산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각종 사회 문제와 궤를 같이한다. 별 따기 만큼이나 구하기 어려운 일자리 문제가 대표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따르면 한국 올해 1분기 청년실업률은 10.9%, 체감 실업률은 11.3%에 달했다. 젊은이 10명 중 1명은 실업자란 얘기다.
그러나 점점 지쳐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기성세대들은 좀 다르게 이야기 한다. 386세대인 대기업 중견간부 A씨는 "젊은이들의 '헬조선론'을 들으면 세상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들여 뭔가를 얻으려 하지 않고 지름길만 가려다가 포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젊은이들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며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도 크다.
그렇다면 취업문을 뚫은 이들은 '헬조선'이란 개념을 잊을까. 많은 경우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을 해도 무한 경쟁 사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연속이라는 것. 때문에 3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민계(契)'까지 등장했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도 없는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에 지쳤다는 직장인들은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매달 일정금액의 돈을 곗돈으로 적립하며 타국 이민을 준비한다. '헬조선'에 질린 젊은이들이 '탈(脫)조선'을 꿈꾸는 것이다.
[북유럽 가서 살겠다는 30代들... 前직장 알아보니 삼성·LG 많더라]
사실 이런 한국 혐오 신드롬은 과거부터 무수히 언급되어온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에서부터 나타난다.
'미생', '직장의 신' 등… 드라마서도 이런 젊은이들의 모습이 투영
웹툰 원작의 드라마 '미생'의 열풍도 이러한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주인공과 스펙으로 평가받는 사회, 여기서 느끼는 젊은이들의 좌절들을 그려내 젊은층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에게 두루 인기가 많았던 드라마다. 씁쓸하지만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사회 현실에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밖에도 최근 이슈가 되어온 '3포세대' 등의 이야기를 녹여낸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하며 과거에 고정적이었던 드라마 스토리까지 바꿔 놓고 있다.
좌절을 넘어 극단적 선택하는 이들도…
'88만원 세대'로 스스로를 비하하는 20대는 물론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청년 세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 되었다. 한국이 한 해 1만6000명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떠안게 된 오늘이다. "앞이 안 보인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청춘들이 남긴 유서에서 그들의 깊은 좌절을 볼 수 있다.
[88만원 세대의 밥집은 편의점... "3000원 도시락에 고기반찬이 어디냐"]
88만원 세대 처럼 불안한 젊은이를 가리키는 용어는 또 있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에서 힌트를 얻어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비슷하게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달관 세대'다.
일본에서 생겨난 개념인 사토리 세대는 '욕망하지 않는 세대'로 규정된다. 자동차나 브랜드 옷을 사지 않는다. 스키나 테니스 등 스포츠도 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지 않는다. 연애에도 관심이 없다. 돈을 열심히 모으지만, 필요 이상으로 돈 벌려는 욕심도 없다. NHK가 작년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 20대의 28%가 '현재 삶에 만족한다', 61%가 '대체로 만족한다'라고 답했다. 10명 중 9명이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달관 세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기 보다는 현재에 안주하며 지금 이순간 행복한게 최고라는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좌절을 넘어 자기방어적 만족의 단계에 이른 것.
저성장, 장기 불황 시대에 좌절해 스스로를 '88만원 세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라고 자조하던 20·30대 가운데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젊은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법을 터득하자는 이들이다. 그들은 "양극화, 취업 전쟁, 주택난 등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절망적 미래에 대한 헛된 욕망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사는 게 낫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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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 중 하나 이상을 포기하겠다."
청년 실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최근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를 넘어서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한 '5포세대', 여기에 꿈, 희망까지 포기한 '7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30세대 498명을 대상으로 '7포세대'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85.9%가 "일곱 가지 중 하나 이상을 포기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포기할 생각이 없다"라고 답한 응답자는 14.1%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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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깡패', '이케아 세대' 등 관련 신조어 속속 생겨나…
이 밖에도 청년 실업난이 극심해지면서 생겨난 신조어들은 많다. 스웨덴의 가구 전문매장으로 낮은 가격에도 불구, 세련된 디자인과 높은 실용성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케아'에서 의미를 따온 '이케아 세대'는 뛰어난 스펙을 가졌지만 낮은 급여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청년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이들을 두고 ‘빨대족’이라 부른다. 취업 전문 포털 사람인이 조사한 결과, 취업준비생의 절반(48.4%) 가량이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다른 전공보다 취업이 잘 되는 과를 일컫는 의미의 신조어 '취업깡패'도 유행이다. 과거에 경영학과가 취업 시장에서 각광을 받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주요 대기업이 이공계 출신 채용 비율을 높이거나 우대하고 있는 추세다. 이에 공대생 중에서도 취업이 상대적으로 잘 되는 전자나 화공, 기계 관련 학과 전공자를 의미하는 '전·화·기' 출신 구직자들을 두고 '취업깡패'라 부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취업깡패가 부러운 이케아 세대?…취업난에 신조어 속속]
문화 콘텐츠들도 이런 사회 분위기 따라가…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인기
지난 5월 출간돼 20~30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3개월 만에 1만부 팔린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헬조선 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을 반영한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 이민을 선택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젊은이들의 많은 공감을 얻으며 SNS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예능 음악 프로그램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 열풍
이제 '힙합'은 대중음악 하위 장르 중 하나가 아니라 10~20대의 취향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문화가 됐다. 힙합 경연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리즈를 보며 젋은이들은 속물적 욕망을 드러내며 사회를 풍자·비하하는 랩퍼들의 거친 랩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힙합 동아리 활동을 하는 대학생 A씨는 "아이돌 음악에서 표현하지 않는 것들을 힙합은 표현할 수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때문에 힙합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빡빡한 사회에 지친 이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는 수단이 필요했다. 20세기 10~20대들이 저항의 표현 수단으로 록을 택했다면, 21세기 그들에게는 힙합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