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의는 무협지에서 소위 장풍(掌風)이라고 지칭하는, 팔괘장(八卦掌)의 최고 경지인 팔괘연환장법(八卦連環掌法)을 최종 목표로 하여 정진한다."

태양계 밖으로 우주선을 날려보내고 군인용 '입는 로봇'과 레이저포가 등장하는 첨단 과학 시대에 장풍을 가르치는 대학 교양 강좌가 10년 넘게 인기를 끌고 있다.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철학과(원주캠퍼스)가 운영하는 '신체 미학과 동양무술의 철학'이다. 전국 대학 중에서 장풍을 가르치는 곳은 이 강좌가 유일하다. 이 강좌는 철학과 '스테디셀러 강의'로 꼽힌다. 2003년 처음 개설된 이후 13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 과목을 들으면 3학점을 딸 수 있다.

연세대 관계자는 "매년 평균 수강생은 30~40명으로 지금까지 500명 가까운 학생이 장풍 강의를 들었다"며 "수강 인원이 15명 이하면 폐강되는 교양강의의 수명이 보통 3년이고 길어야 5년인 점에 비춰보면 장풍 강의의 인기는 꾸준하다"고 말했다.

무협지나 홍콩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풍, 그것은 과연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일까.

장풍 맞아봤더니…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공원. '장풍 교수'로 알려진 박정순(61)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전통 의상에 검은색 면바지 차림이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장풍을 보여달라'고 하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넓은 걸음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보법(步法)을 펼쳐보인 것이다. 박 교수는 원을 돌면서 양팔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굽히며 무술 동작을 취했다. 철학 교수는 순식간에 무술 고수(高手)로 변신했다. 2~3바퀴쯤 돌았을까. 박 교수가 쏜살같이 기자를 향해 달려와 가슴에 손바닥을 살짝 댔다. 강한 힘으로 치거나 민 것도 아닌데 1m쯤 뒷걸음쳤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는 "실전에서 사용하는 기(氣)의 10분의 1만 사용했다"며 "살수(殺手)로 장풍을 사용했다면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협지 등에서 보듯 손을 안 대고 먼 거리에서 바람만으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박 교수도 "몇m 거리에서 사람을 날려버리는 그런 장풍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장풍이란 극도로 끌어올린 내공을 손에 담아 상대가 반응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태극권·형의권·소림권과 함께 중국의 사대명권(四大名拳)으로 꼽히는 팔괘장의 주된 공격 방식인 장법(掌法)이 바로 장풍의 실체라는 설명이었다.

결국 기자가 뒤로 밀린 이유도 박 교수의 장풍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갑자기 달려오는 모습에 움츠러드는 상황에서 그의 손이 기자의 몸에 닿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록 장풍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을 제압하는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았다. 중국 경찰은 실제 범인을 잡을 때 사용하는 공식 무술로 팔괘장을 채택했다고 한다.

박정순 연세대 철학과 교수(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풍 강의’를 수강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장법(掌法)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박 교수는 “팔괘장의 주요 타격 수단인 장법을 연마하면서 심신을 수련할 수 있다”고 했다.

장풍의 실체, 팔괘장

팔괘장의 주요 타격 수단은 손바닥(掌)이다. 태극권·형의권·소림권의 무기가 주먹(拳)인 것과 다르다. 그런데도 위력은 강력하다. 이 때문에 팔괘장의 특징을 면중포철(棉中包鐵)이라고 한다. 부드러운 면처럼 보이는 손바닥에 쇠처럼 단단한 위력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팔괘장이라는 이름은 동양 사상의 핵심인 음양(陰陽) 팔괘(八卦)의 원리에 따르기 때문에 붙었다. 팔괘를 따라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보법'이 팔괘장 수행의 핵심이다.

박 교수는 "사실 팔괘장은 정신 수양 수단의 하나"라고 말했다. 박 교수의 원래 전공은 서양철학이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윤리학·사회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릴 때 우연히 무술에 입문, 50년 가까이 수행 중이다. 그는 "팔괘장 수련을 통해 신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정신과 신체, 감정과 이성은 본래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듯 동·서양 철학의 접점 역시 팔괘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신체의 아름다움과 정신 수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팔괘장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지난 1학기 때 이 강좌를 들은 정종재(25·응용생명과학과)씨는 "장풍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동양 철학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인표(21·철학과)씨는 "'진짜 장풍이 있단 말이야?'라는 호기심에 수강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니 심신이 더욱 맑아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최근 '건강 무술'로 주목

팔괘장은 19세기 청나라 황실의 관리였던 동해천(董海川·1797~1882)이 창시했다. 태극권 등 기존 무술에 건강과 장수를 목적으로 하는 양생법(養生法)을 가미했다. 한 팔괘장 수련자는 "중국 팔괘장 노사(老師) 중 90~100세까지 장수한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팔괘장은 창시자의 제자들에 따라 문파(門派)가 여러 개로 갈렸다. 한국의 팔괘장은 크게 두 문파가 양분하고 있다. 정정화(程廷華)를 따르는 정파(程派)가 20세기 초엽 인천에 진출했고, 윤복(尹福)을 따르는 윤파(尹派)가 20여년 전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팔괘장을 수련하는 사람은 소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팔괘장은 최근 '건강 무술'로 주목을 받는다. 한병철 서울팔괘장연구회장은 "과거에는 '장풍을 쏠 수 있느냐'고 묻는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요즘에는 성인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팔괘장 운동 방식을 살펴본 허갑범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는 "당뇨·비만·고혈압 등 성인병 환자와 노인들에게 효과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허 교수는 "수련이 주로 걷기 위주로 구성돼 있어 하체 근육을 강화하는 스쿼트(Squat)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원을 계속 돌면서 다리뿐 아니라 두 팔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신체 전반의 균형을 잡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