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준·그책 대표

오전에는 편집 회의나 문서작업에, 오후에는 사람들과 미팅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정작 원고를 마주할 기회는 주로 깊은 밤에 찾아온다. 오랜 벗이나 작가와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이면 밤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마감 시점이 임박한 원고가 있을 때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담당 편집자에게 전할 메모를 적고, 없으면 신간 아이템을 찾아 웹서핑을 하거나, 평소 읽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책을 탐독한다든지 음악을 들으며 소일한다. 거의 유일한 SNS 출구인 페이스북에 하루 한 번 글을 올리는 작업도 주로 밤 시간에 이루어진다.

워낙 취미가 제한적이고 신변잡기에 능한 편이 아니기에 대체로 만날 이도 정해져 있고, 쓸데없는 모임에 불려 나갈 이유도 없다. 출판사가 모여 있는 동네다 보니 가끔 지인이 창가의 블라인드 사이로 비치는 불빛을 발견하고 전화가 오면 술 한잔 정도 여유는 남겨둔다.

사무실에 오래 머물다가 나른해지면 새벽까지 하는 동네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음미하면서 책을 읽는 습관이 최근 생겼다. 아침형 인간과 달리 올빼미형은 카페인이 숙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美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 결과를 전한 기사를 본 기억이 내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사간동 시절의 프랑스문화원을 향해 걷던 길을 떠올리다가 신비롭고 관능적인 기운이 스며든 라벨의 피아노협주곡 2악장은 과연 어떤 영화 장면에 어울릴까에 이르기까지 스탠드 불빛 하나로도 충분히 작은 방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저절로 마음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밤거리에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것이며, 요즘 가장 고마운 이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어김없이 흘러간다는 면에서 야속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다음 구절을 하루에 세 번 이상 떠올릴 일이다. (더 늦기 전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